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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년 03월 29일 (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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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08) 천상첩지(淺嘗輒止)- 얕게 맛보고는 곧바로 그만둔다

  • 기사입력 : 2015-11-17 07: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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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어릴 적에 어른들 심부름으로 10여 리 떨어진 다른 동네에 갔지만, 이야기를 전할 그 어른은 집에 있지 않았다. 헛걸음이다. 사전 정보가 없었기 때문이다.

    요즈음은 약속한 사람이 어디 오고 있는지, 우편물이 어디쯤 오고 있는지, 심지어 시내버스가 어디 오고 있는지도 다 안다. 사전 정보가 있기 때문이다.

    몇 년 전에만 해도 생각하지 못하던 편리함을 지금 누리고 있다. 그러나 편리하기만 하면 좋겠는데, 사방에 정보망이 연결되다 보니 자기 시간이 없다.

    거의 모든 정보를 손가락 한두 번만 누르면 얻을 수 있다. 그러니 진득하게 책을 읽고 궁리를 하는 일을 하지 않는다.

    그러다 보니 조금만 뜻대로 안 되어도 짜증을 내고 남의 탓으로 돌린다. 분노 조절이 안 되고, 우울증 환자가 급증해 큰 사회문제가 되고 있다.

    책을 읽는 것은 단순히 지식만 습득하는 것이 아니고 사람의 인격까지 수양할 수 있다. 차분하게 꾸준히 자기 생각을 가지고 읽으면 지식은 물론 정신까지 함양할 수 있다.

    조선 영조 때 하빈(河濱) 신후담(愼後聃)이란 학자가 어린 손자에게 준 글을 소개한다.

    “나는 ‘중용(中庸)’을 가장 많이 읽었다. 만 번 읽은 이후로는 헤아리지 않았지만, 1만 번 이후로도 수천 번 이상은 더 읽었을 것이다.

    ‘대학(大學)’은 5000번 이후로는 헤아리지 않았는데, 1만 번에서 그다지 멀지 않을 것이다. ‘서경(書經)’과 ‘주역(周易)’은 각각 수천 번씩 읽었다.

    ‘시경(詩經)’, ‘논어(論語)’, ‘맹자(孟子)’는 각각 1000여 번 읽었다. ‘소학(小學)’은 100여 번 읽었다.

    ‘이정전서(二程全書)’, ‘주자대전(朱子大全)’, ‘심경(心經)’, ‘근사록(近思錄)’, ‘성리대전(性理大全)’은 평생토록 읽었는데, 그 가운데서 베껴내어 100번, 혹은 수십 번 읽은 것이 있다.

    ‘백가류찬(百家類纂)’은 수십 번 읽었다. 그 가운데 ‘도덕경(道德經)’, ‘음부경(陰符經)’, ‘남화경(南華經)’, ‘참동계(參同契)’는 수백 번, ‘대대례기(大戴禮記)’, ‘왕씨역례(王氏易例)’, ‘초씨경씨역문(焦氏京氏易文)’, ‘신공시설(申公詩說)’ 같은 책은 수십 번 읽었다. 사마천(司馬遷)의 ‘사기(史記)’, 한유(韓愈)의 ‘창려집(昌黎集)’ 등은 베껴 읽었는데, 어떤 것은 100번, 어떤 것은 수십 번씩 읽었다.

    그 밖에 수십 번에 미치지 못하는 것은 적지 않는다. 많이 읽었지만 짧은 글은 적지 않는다. 너는 가업을 잘 계승하기 바란다.”

    손자에게 주는 글에 거짓이 있을 리 없다. 공부는 머리 좋은 사람이 크게 이루는 것이 아니고, 끈기를 갖고 부지런히 하는 사람이 크게 이룬다.

    대충 겉만 핥고 말아서는 안 되고 참맛을 알아야 오래갈 수 있고 최후에 성취를 할 수 있다.

    *淺: 얕을 천. *嘗: 맛볼 상.

    *輒: 곧 첩. *止: 그칠 지.

    경상대 한문학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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