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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년 04월 19일 (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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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살롱] 일상탐독 (12) 이성복/어떤 싸움의 記錄

  • 기사입력 : 2015-11-19 14:12: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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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나는 이미 독이 오를대로 오른 상태였다.

    나는 어떤 결심 속에 있었다.

    누가 그날 내 얼굴을 봤다면, 뱀의 눈처럼 차가운 눈동자 속에 단단하게 또아리를 튼 붉은 불빛을 보았으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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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차례를 지낸 뒤 친지들 모두가 둥글게 둘러앉아 막 식사를 시작하고 있었다.
    여느 때와 다름없이 왁자한 분위기였고 모두가 화기애애한 대기 속에서 활짝 웃고 있었다.
    나도 숟가락을 들었고, 뜨거운 탕국을 한 숟갈 떠 입으로 가져갔다.
    젓가락을 뻗어 민어와 도미의 흰 살점도 뜯어 먹었다. 생선의 살은 짜면서도 달았다.
     
    그러나 나는 먹고 있는 것이 아니었다.
    나는 공격할 틈, 그 좁고 날카로운, 섬광같은 한 순간을 노리고 있었다.
    그날의 싸움은, 그것을 싸움이라 불러야 마땅하다면, 기습적으로 이루어지리라.
    그리하여 오늘은 꼭 말하리라. 꼭 당신들의 잘잘못을 내 입으로 심판하리라.
     
    그래서는 안 되는 사람들이었다.
    또한 나는 지난 30여년을 그렇게 길러지지 않았다. 단언컨대 나는, 그런 방식으로 행동하도록 프로그래밍 된 사람이 아니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그날 그렇게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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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식사가 거의 마무리 됐을 쯤이었을 것이다. 나는 그와 그녀를 똑바로 쳐다보고 말했다.
    '할말이 있어요.'
    친지 몇은 여전히 음식을 먹고 있었고, 몇은 고개를 돌려 나를 쳐다봤다.
    '정말 경우가 없으시네요.'
    내 두번째 발언에 친지들 대부분이 일제히 젓가락질을 멈췄다.


    나는 말했다. 오래 준비했던 말. 몇번을 가다듬고 정제해 함축하고 비축했던 말.


    '온다간다 말 한마디 없고 고생한다 말 한마디가 없네요. 우리가 언제 도와 달라 했나요, 제수비용을 보태달라 했나요? 그러나 최소한의 예의는 갖추셔야지요. 연락이라도 제때 해야 사람이 걱정을 덜하고 하염없이 기다리지나 않지요. 왜 그러실까요. 배울만큼 배우신 분들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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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모두가 그 자리에 얼어버렸다. 입속에 자갈이라도 한 주먹씩?문 것처럼, 시커멓게 굳었다.
    그렇게 몇 분이 몇 년처럼 흘러갔다. 어느 누구도 어떤 소리도 내지 않았다. 쿵쾅대는 맥박이 금방이라도 살갗을 뚫고 나올 것만 같았다.
     
    판을 깬 사람은 그녀였다.
    그녀는 아랫입술을 앙다물더니 현관문을 열고 밖으로 나가버렸다. 그녀의 플레어 스커트 자락이 현관 안에 긴 그림자를 남겼다. 곧 거친 문 소리가 고요한 거실에 둔탁하게 울려퍼졌다. 아무도 말리지 않았다.


    이제 그의 차례였다.
    그는 쥐고 있던 숟가락을 집어던졌다. 숟가락에 묻어있던 쌀알이 바닥을 나뒹굴었다.
    그가 내 눈을 노려보며 말했다.
    '감히 니가, 니가 뭔데 이래라 저래라 하는거냐. 니가 내 상전이라도 되는거냐. 서울에서 여기를 왔다갔다 하는 게 그리 쉬워보이냐.'

    그는 몹시 당황했고, 그러므로 격앙돼 있었다.
     
    나는 두번째 기습을 노렸다. 내 입술은 노회한 노인의 그것처럼, 아주 천천히 열렸다.
    '됐고요. 이제 엄마 아빠한테 연락이나 꼬박 꼬박 잘 하세요. 똑바로 하시라고요.'
    말을 마친 나는 자리에서 일어섰다.
    그리고 서랍장에 놓여있던 차키를 잡아채듯 집어들고 허리를 꼿꼿이 세운 채 걸어나갔다. 나는 그날 밤 늦도록까지 집으로 돌아가지 않았다.


    그?눈부시던 가을날, 친지들이 어떤 마음으로 돌아갔는지, 뒷수습은 어떻게 이뤄졌는지 묻지 않았다. 알고싶지 않았고, 굳이 알아야할 필요도 없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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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톨스토이의 장편소설 '안나 카레리나' 첫 구절은 이렇다.
    "행복한 가정들은 모두 비슷하게 행복하지만, 모든 불행한 가정은 저마다 다른 방식으로 불행하다."
    이 문장을 보고 오랫동안 생각에 잠긴 적이 있었다.
     
    다복하고 화목한 대화와 웃음, 다정한 제스쳐.
    그러나 그 안에 깃든 허구를 나는 본다.


    결혼과 출산, 육아, 집안 대소사, 권리와 의무의 혼재,?무한반복되는 적나라한 일상. 그 속에 깃든 갈등. 닳고 닳은 관계. 부서져내리는 자아(自我). 사실은 모두가 알고도 모른 척하고 사는 그것.

    그것에 대해 한번은 시비를 걸고 따지고 싶었다. 가슴 아프게, 그러나 통쾌하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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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 글은 2년 전 추석, 내가 결코 저질러서는 안 되지만 저지르고 만 어떤 싸움에 관한 기록이다.

    그날의 경험을 이성복 시인의 시에 빗대어 적어보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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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그는 아버지의 다리를 잡고 개새끼 건방진 자식 하며
    비틀거리며 아버지의 샤쓰를 찢어발기고 아버지는 주먹을
    휘둘러 그의 얼굴을 내리쳤지만 나는 보고만 있었다
    그는 또 눈알을 부라리며 이 씨발놈아 비겁한 놈아 하며
    아버지의 팔을 꺾었고 아버지는 겨우 그의 모가지를
    문 밖으로 밀쳐냈다 나는 보고만 있었다 그는 신발 신은 채
    마루로 다시 기어 올라 술병을 치켜들고 아버지를 내리
    찍으려 할 때 어머니와 큰누나와 작은누나의 비명,
    나는 앞으로 걸어 나갔다 그의 땀 냄새와 술 냄새를 맡으며
    그를 똑바로 쳐다보면서 소리 질렀다 죽여 버릴 테야
    法도 모르는 놈 나는 개처럼 울부짖었다 죽여 버릴 테야
    별은 안 보이고 갸웃이 열린 문 틈으로 사람들의 얼굴이
    라일락꽃처럼 반짝였다 나는 또 한번 소리 질렀다
    이 동네는 法도 없는 동네냐 法도 없어 法도 그러나
    나의 팔은 罪 짓기 싫어 가볍게 떨었다 근처 市場에서
    바람이 비린내를 몰아왔다 門 열어 두어라 되돌아올
    때까지 톡, 톡 물 듣는 소리를 지우며 아버지는 말했다'
     
    '어떤 싸움의 記錄'- 문학과지성사/이성복/'뒹구는 돌은 언제 잠 깨는가' 55페이지
     
    김유경 기자 bora@knnews.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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