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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년 03월 29일 (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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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길.예.담] (17) 자연 그리는 강복근 화가 작품 속 창녕 화왕산성길

지친 마음 어루만지는 억새의 하얀 손길

  • 기사입력 : 2015-11-20 07: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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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강복근 서양화가가 창녕 화왕산 정상의 드넓은 억새밭길을 걷고 있다./김승권 기자/


    청춘들은 아프다. ‘아프니까 청춘’이란 말은 청춘의 아픔을 보듬어주지 못하는 이 시대 기성세대의 변명에 지나지 않는다고 항변하지만, 그럼에도 청춘들은 아프다.

    이를테면 어린 시절 꿈꾸던 것들을 현실에서 추구할 수 없다는 것을 알게 될 때, 삶에 대한 치열한 고민이 겹겹이 쌓여도 정작 세상에 한 발짝 내딛는 것조차 쉽지 않을 때, 어쩌면 삶은 ‘서정’이란 것을 쉽게 허락하지 않는다는 것을 느낄 때. 이제 막 세상을 알아가고 있는 청춘에게 세상은 차갑고 황망하고 아프다.

    가을이 지나가고 있는 화왕산성길의 바람과 억새는 그런 청춘의 아픔을 어루만진다. 아픈 일도 가을과 함께 다 지나간다고, 억새가 지면 아픈 일도 질 것이라고, 그러니 아직 더 아파해도 된다고 속삭인다. 그러면서 청춘도 흘러가는 거라고 토닥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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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강복근 作 ‘화왕산의 자연, 자생, 자아’

    가을의 끝자락, 억새가 손을 흔드는 화왕산성길을 잔잔하게 묘사한 강복근 작가와 함께 걸어봤다.

    오후 3시. 해는 저 멀리 구름 뒤에 숨어있었다. 고암 자연휴양림을 지나 허준세트장을 끼고 계속 올라간다. 정상으로 향하는 굽이진 길 곳곳에 나무들은 가을을 잔뜩 떨어트려 놓았다. 짧은 가을이 못내 아쉬워 지나간 길을 뒤돌아보고 또 뒤돌아보고 발자국에 묻어나는 가을을 귀에 담는다.

    화왕산성 동문(東門)으로 들어선다. 바깥쪽으로 깎아지른 두 봉우리가 비슷한 높이로 솟아있다. 5만평이 넘는 산성 안이 시야에 확 들어온다.

    자연광을 받아 빛을 따뜻하게 머금은 억새를 기대했으나 그런 서정을 화왕산은 허락하지 않았다. 아직 덜 춥고 기상이 썩 나쁘지 않았다는 것에 만족하며 억새와 억새 사이 길을 걷는다.

    평일 오후, 절정이 끝나가는 가을 억새에 일렁이는 바람 소리의 결이 곱다.

    강복근 작가의 작품은 화려하지 않지만 따뜻하다. 그는 자연에서 받은 감동을 잔잔하게 캔버스에 옮긴다. 그림에 원색만을 사용하고 수십 년간 ‘한국의 자연·자생·자아’라는 제목만으로 작품을 내거는 그의 고집도 한결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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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자연에서 느낀 감정과 생각을 바로 캔버스에 옮겨 담고 싶어 최근에는 미니버스도 한 대 장만해 이동식 작업실로 꾸렸다. 가고 싶은 곳 어디든 바로 달려가서 현장에서 느낀 찰나의 느낌을 작품에 담고 싶어서란다.

    그의 작품에는 자연 속 길이 유독 많다. 이 또한 고집스럽다. 화왕산성을 그린 여러 작품 속에도 길이 시선을 끈다. 그래서 물어본다. 작품 속에 왜 그렇게 길이 많이 등장하는지. 돌아오는 대답이 더 고집스럽다.

    “길이 없으면 사람이 걷질 않잖아요. 마찬가지로 길이 있어서 나도 길을 그리는 거지.” 괜히 물어봤나 싶다. 몇 차례 더 우문현답이 이어진다.

    그러는 사이 가을 끝자락 화왕산성길에 작가도 취했는지 한마디 더 거든다. “마음이 힘들 때면 둥글고 완만한 능선을 따라 갈래난 화왕산성길을 걸으면 마음의 위안을 얻습니다. 지치고 힘들 때 자연으로 돌아가는 건 자연의 본질과도 같은 거죠.” 그러면서 그는 물 만난 고기처럼 신나서는 고집스럽게 그의 작품과 자연을 예찬한다.

    “자연을 능가하는 스승은 없습니다. 자연은 인간 영혼의 상처를 치유해주고 살균해 주는 진통제 같은 것입니다. 예술창조의 원천은 자연입니다.”

    또 한결같이 그림 속에 사람을 그리지 않는 것을 두고는 “자연 자체가 가장 큰 의미이고 큰 힘이기 때문”이란다. 특히나 화왕산은 그림을 그리려고 마음먹을 때마다 몇 번이고 다시 찾아와 한참이나 걷다 가는 길이라 애착이 묻어난다고 말한다. 그러나 여전히 자연의 향기나 소리를 캔버스에 생생하게 담는 건 어렵다고 한다. 그가 자연 앞에 여전히 겸손한 이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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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드론으로 촬영한 창녕 화왕산길./구윤성 VJ/

    오후 4시. 성벽의 형태가 잘 남아 있는 동문에서 남쪽 봉우리를 향해 발걸음을 옮긴다. 바람은 좀 더 거칠어졌다. 자세히 느껴보면 이곳 산성 안 바람의 방향과 세기는 시시각각 변한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손끝에 스치는 바람을 느끼며 걷기를 잠시, 바람은 이내 다시 잦아든다.

    오후 5시. 내려가는 길에 강 작가는 자신에게도 있었던 청춘을 이야기한다. 강 작가는 20년 넘게 나이프를 이용해 물감을 긁어내는 독특한 방법으로 그림을 그리고 있다. 왜 다른 작가들처럼 붓으로 그림을 그리지 않냐고 묻자 나지막하고 쓸쓸한 답이 돌아온다.

    “원래는 붓으로 그림을 그렸죠. 그런데 어느 순간 이대로는 화가로서 살아남을 수 없을 것 같다는 현실의 무서움이 저를 움직이게 만들었어요. 대학원 때 교수님이 칼로 물감을 긁어내는 기법을 즐겨 쓰셨는데, 저도 한번 해보자고 마음먹었어요. 그림을 그리면서 느낀 현실의 차가움, 그 속에서 수없이 치열하게 고민한 시간이었어요. 제게 청춘은.”

    차가운 현실, 치열한 고민을 거쳐 그렸을 그의 그림은 왠지 쓸쓸하면서도 따뜻하다.

    가을이 지나가는 자리, 드넓은 억새 군락 화왕산성길이 주는 위로와 위안은 쓸쓸하지만 온화한 미소를 머금게 한다. 계절의 흐름에 맞춰 향연을 펼쳤을 이곳도 가을이 저물며 억새와 억새 사이 외로움이 들어찼다. 이제는 쓸쓸함이 더해지는 곳이 됐다. 왠지 쓸쓸해서 더 힘을 얻게 되는 곳이다.

    11월의 화왕산성길의 바람과 억새는 어른이 되는 치열한 과정이 너무 지치고 힘들 때나 세상이 너무나 차가워 따뜻한 위안이 필요할 때 찾아와 힘을 얻고 가라고 손짓을 한다.

    말안장을 빼닮은 너른 성 안에, 바람에 손 흔드는 억새에 모든 청춘의 아픔을 털어놓고 내려간다. 차가운 세상에서 한 발 내디딜 따뜻한 힘을 얻어 내려간다.

    도영진 기자 dororo@knnews.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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