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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년 04월 20일 (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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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길.예.담] (18) 권환 시인의 고향 마산 진전 오서리 문학산책

깜빡 잊혀진 시인, 그가 걸었던 문학길 속 고향길
나라 잃은 시대 일제강점기 때
노동자·농민의 삶 대변

  • 기사입력 : 2015-12-03 22: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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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단풍이 저마다의 색을 내면서 주변과 잘 어우러지는 날이었다. 날씨는 쨍하게 화창해 파란 하늘이 더욱 두드러졌다. 이어지는 경운기 소리가 계절을 일깨우는 이곳은 창원시 마산합포구 진전면 오서리. 나라 잃은 시대, 노동자와 농민의 삶을 대변하며 계급문학의 중심에 서 있던 권환 시인의 고향이다. 그는 1903년 이곳에서 태어나 1919년 서울로 올라갈 때까지 살았다. 결핵이 심해져 1948년부터 다시 마산에 내려와 살다 1954년 마산합포구 완월동에서 가난한 생을 마쳤다. 조선 프롤레탈리아 예술가 동맹, ‘카프(KARF)’의 맹원으로 활동하면서 한동안 이념의 테두리에 갇혀 지냈던 그의 작품들과 그는 세월이 흘러 사람들로부터 ‘깜빡 잊어버린 이름’이 됐다.

    그럼에도 그를 끊임없이 부르는 이들이 있다. 제12회 권환문학제의 두 번째 날인 지난 11월 15일, 권환 생가와 유택, 오서리 들녘 등지를 도는 ‘오서리 문학길 산책’에 함께 나섰다. 권환기념사업회의 사무국장을 맡고 있는 송창우 시인과 경남대학교 박물관 박영주 비상임연구원이 앞장서서 권환의 이야기를 들려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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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슬기 기자가 권환 시인의 묘가 있는 창원시 마산합포구 진전면 오서리 보강산의 초입길을 걷고 있다./성승건 기자/
    오서리 일대는 안동 권씨의 집성촌이다. 마을을 가르는 큰 길을 두고 좌우로 일가들이 살고 있다. 길가에 있는 ‘안동 권씨 세거지’라 쓰인 표지석이 이를 알린다. 다 삼촌집이라 이 주변에 다방과 술집이 없는 것 아니냐는 말도 건넨다. 비석을 두고 대각선으로 길을 건너면 기와집이 나온다. 산책의 출발지인 경행재다. 이곳은 안동권씨 문중 회계서원의 지원으로 1867년 건립된 것이나 일제강점기인 1910년부터는 사립 경행학교의 교사로 쓰였다. 1985년 경상남도 문화재자료 제132호로 지정돼 있다. 박영주 연구원이 길을 떠나기에 앞서 경행재의 뜻에 대해 설명했다. 20여 명의 눈과 귀가 그를 향했다.

    “경행재는 시경에 나오는 말인데, 경을 향한다는 뜻이지요. 경이 경치와 햇빛을 뜻하기 때문에 옳고 바른 것을 당당히 행하면 성인이 될 수 있다는 뜻을 가지고 있습니다. 굉장히 교육적인 단어로, 학교 이름으로 적절하지요. 이 현판은 독립운동가로 잘 알려진 신익희 선생의 글씨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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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권환 시인


    분실을 대비해 평소에는 방안에 들여놓는 현판을 구경하고서는 경행재를 등지고 햇빛이 내리쬐는 마당을 둘러봤다. 수세미가 주렁주렁 열린 돌담을 따라 눈길을 마당 오른편으로 옮겨가면 비석 두 개가 들어온다. 삼진의거에서 활약해 이곳을 독립운동의 요람으로 불릴 수 있도록 한 권영조 선생의 기념비와 경행학교를 세운 권오봉 선생의 공덕비다. 권오봉 선생이 권환(본명 권경완)의 아버지다. 이곳에서 권환은 수학하고, 아버지 일을 도우며 어린 시절을 보냈을 것이다.

    아까 마주쳤던 권씨 세거지 비석과 동네 구멍가게 사이를 비집고 들어간다. 곧 진사가 많이 나왔다 하여 ‘진사길’이라고 불리는 골목에 다다라, 집들 사이 작은 밭을 만났다. 표지석 하나 없는 밭뙈기가 권환 시인의 생가터다. 마산합포구 진전면 오서리 565번지. 이제는 숫자로만 정확히 알아볼 수 있는 집터 가운데 깡마르게 서 있는 감나무 하나가 눈에 들어왔다. 몇 안 되는 감이 떨어져 시큼한 냄새를 풍기고 있어 생존을 알린다. 어린 권환과 지금까지를 지켜보며 살아남았다. 권환은 자신의 시에서 이 감나무를 떠올리며 집을 그리워한다.


    우리 집이 어드메 어느 게냐구요/산 너머도 바다 건너도 아니라오//당홍 고추 하얀 박이 울긋불긋/초가 지붕을 수놓은/저-기 저 집이라오//꽃송이 같은 반시 홍시/전설같이 주렁주렁 달린 감나무/까치 한 때 날라 앉은/저-기 저 집이라오 (…) - ‘집’ 일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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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마산합포구 진전면 오서리 문학길.


    서울과 일본 등 먼 타지에서 붉은 감이 떨어지고 박이 넘실대며 색시 뒤에 강아지가 따라나오는 집. 핏줄이 한 동네 모여 사는 따뜻한 남쪽을 사무치게 그리워했을 마음을 짐작한다. 늘 그렸던 아름다운 곳으로 그린 집, 그가 지금 이곳의 모습은 내려다보지 말기를 바라게 됐다. “2년 동안은 감도 안 열리더니 올해는 열렸네요. 생가가 복원되면 참 좋을 텐데….”

    끊어진 관심에 감나무마저 마음을 돌렸을까 걱정했던 마음을 안고 골목 안쪽으로 더 들어간다. 사나운 개가 있는 집 안으로 들어가니 권씨 집안 사람들이 공부하던 서실이 남아있었다. 이곳 앞에 석등이 있어 불을 밝히고 공부하던 곳이었다는 것을 적어 놓은 비석이 있다. 그러나 서실은 딱 절반이 붙에 타 안타까운 형상을 하고 있었다. 신기한 것은 서실의 무너짐을 격렬히 반대하는 것처럼 나무들이 지탱하고 있었다. 촘촘히 그물망처럼 가지를 뻗어 건물을 덮어나갔다. 건물을 꼭 안았다.

    권환이 불을 켜고 공부했을 곳들을 둘러보고는 마을을 빠져나와 아스팔트로 포장된 큰길을 따라 걸었다. 오서리 들녘이 양쪽으로 펼쳐졌다. 지금은 묘목을 키우는 곳이 많아졌지만 몇 년 전만 해도 4, 5월 바람에 흔들리는 청보리가 아름다웠던 곳이라고 했다. 권환이 살던 때는 목화밭이었다. 권환은 고향의 목화밭도 문학의 소재로 삼았다. 소작 문제를 다룬 농촌소설 ‘목화와 콩’이 있고 고향을 그리는 시에서도 목화밭을 떠올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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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마산합포구 진전면 오서리 권환 시인의 생가터.


    내 고향의/우거진 느티나무 숲/가이없는 목화밭에서/푸른 물결이 출렁거렸습니다//어여쁜 별들이 물결 밑에/진주같이 반짝였습니다. - ‘고향’ 일부

    낮은 산을 오르는 길로 접어드는 길이 나왔다 큰 나무와 억새들, 정렬비(貞烈碑) 누각이 어우러져 멋스럽다. 권환의 유택으로 가는 길이다. 유택은 그가 ‘거꾸로 박힌 심장형’이라고 한, 고향의 뒷산, 보강산 기슭에 있다. 낮은 언덕을 오르니 안동권씨의 납골당이 있고, 그 너머로 권환 부부의 묘가 있다. 무덤 앞에 그의 일생을 담은 동판이 있지만 멍이 든 것처럼 부식돼 글이 잘 보이지 않는다. 잊혀져 가는 그의 처지와 닮아 있다.

    그래도 여전히 동판을 닦아내 소개하는 이들이 있다. 원은희 시인은 “권환 시인이 경남 문인의 앞자리에 있어야 하는 분이라고 생각합니다. 마산 정신과 가장 맞닿은 분, 실천하는 문학 정신이 살아있는 분이기에 이분을 기리는 것은 지역문인들의 소명이라고 생각했어요. 젊은 연구자들과 시인들이 기리면서 연구도 진행됐는데, 사실 발굴하고 제자리매김하는 것이 어렵죠. 아직 열린 사회가 아니라 카프를 앞세운다는 게 쉽지 않더라고요. 정치적 이데올로기에 가려 문인들 참여 저조하지요. 그러나 민중을 위한 통일 한국 생각한다면 민족문학관이 여기 서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지금은 다양한 이해관계가 얽히고설켜 있지만, 북한을 포함한 한국 전체 문학을 이야기한다면 권환 시인이 그 연결고리가 될 테니까요. 오늘의 이 소소한 발길들이지만 이런 것들로 힘을 얻어 꾸준히 노력해보겠습니다.” 어느 누구도 ‘깜빡 잊어버’리지 않길 바라며, 그의 뒷산을 한 번 더 눈에, 입에, 마음에 담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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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권환 시인 생가터 내 감나무.


    거꾸로 박힌 심장형//누런 밤나무 잎이/시냇물 되어 흐르는//뻐꾹새 우는 소리/여기저기 들리는//내 고향의 뒷산/나는 온 하루 밤을 자지 못했다/그 산 이름을 생각해 내려고/깜빡 잊어버린 그 이름을 - ‘뒷산’ 전문

    이슬기 기자 good@knnews.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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