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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11) 백세청풍(백화점世淸風)- 영원한 세월에 걸친 맑은 바람

허권수의 한자로 보는 세상

  • 기사입력 : 2015-12-08 07: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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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함안 가야읍에서 서쪽으로 향하여 가다가 군북읍을 조금 지나 원북(院北) 마을에 이르기 전의 남쪽 절벽에 ‘백세청풍(百世淸風)’ 네 개의 한자가 해서체(楷書體)로 크게 바위에 새겨져 있다.

    이 글씨는 본래 주자(朱子)가 쓴 글씨인데, 중국 요동(遼東) 수양산(首陽山) 기슭의 백이(伯夷) 숙제(叔齊) 사당에 걸려 있던 것이다. 1589년 부친 약포(藥圃) 정탁(鄭琢)이 중국에 사신 가는 길에 따라갔던 아들 청풍자(淸風子) 정윤목(鄭允穆)이 모사해 온 뒤로 해주(海州)의 수양산(首陽山) 등 전국에 퍼진 것이다. 정윤목의 집안에 전하던 글씨 현액은 지금 안동 한국국학진흥원에 위탁 보관돼 있다.

    이곳에 ‘백세청풍’이란 이 글씨를 새긴 까닭은 무엇 때문일까? 생육신(生六臣)의 한 사람으로서 세조(世祖)가 조카 단종(端宗)의 왕위를 빼앗는 것을 보고, 더럽게 여겨 벼슬길을 단념하고 고향 마을로 돌아와 평생을 깨끗하게 살다 간 어계(漁溪) 조려(趙旅)선생의 절의(節義)를 기리기 위해서다.

    잘 알다시피 백이 숙제 형제는, 자기 고국 은(殷)나라를 멸망시킨 주(周)나라의 곡식을 먹지 않겠다고 수양산에 들어가 고사리를 캐어 먹다가 마침내 굶어 죽었다. 후세 사람들이 이들의 깨끗한 정신을 기려 수양산에 사당을 세우고 제사를 올리고 있는 것이다. 현실적으로는 굶어 죽었지만, 이들의 깨끗한 이름은 만고에 없어지지 않고 있다.

    원(元)나라 시인 노지(盧摯)가 ‘채미도(採薇圖)’라는 시에서 이렇게 읊었다. “약을 먹고서 오래 살기를 구하는 이로, 누가 고죽군(孤竹君)의 아들만 할까? 한 번 서산의 고사리를 먹은 뒤로, 만고에 오히려 죽지 않네.[服藥求長年, 孰如孤竹子. 一食西山薇, 萬古猶不死.]”

    어계는 단종에게 꼭 절의를 지켜야 할 의무는 없었다. 그러나 조카를 죽이는 임금, 세종에게 단종을 잘 보필하겠다고 약속했다가 단종을 죽이라고 상소를 여러 번 하는 등 파렴치한 짓을 일삼는 관료들과 함께 벼슬할 수가 없었다.

    그당시 어계는 이름 없는 시골 선비에 불과했다. 별다른 행적도 남아 있지 않다. 그러나 그의 이름은 영원히 남아 전하고 그의 절의정신은 후세에 충절(忠節)을 숭상하는 수많은 인물을 만들어 냈다.

    그가 세조 아래서 고위관직을 지냈다면 후세 사람들의 영원한 스승이 되어 역사에 이렇게 이름이 남을 수 있고 후세에 좋은 영향을 미칠 수 있었겠는가?

    현세의 영달을 추구하면 육신의 수명이 끝나는 순간 그 이름도 사라지지만, 절의를 지키면 영원히 훌륭한 이름이 남을 수 있다. 백이 숙제와 어계선생이 바로 그런 경우이다.

    오늘날 눈앞의 명예와 이익에 이끌려 배은망덕을 밥 먹듯이 하는 인간들에게, 절의를 지킨 인물들이 부끄러움을 알게 해 주는 계기가 될 수 있을 것이다.

    *百: 일백 백. *世: 인간 세, 30년 세. *淸: 맑을 청. *風: 바람 풍.

    경상대 한문학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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