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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년 04월 24일 (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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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남시론] ‘집밥 백선생’과 ‘밥상의 인문학’- 오인태(시인·문학평론가)

  • 기사입력 : 2015-12-23 07: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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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모든 염원은 결핍과 부재에서 비롯한다. 모자라기 때문에 채워지길 바라고, 없기 때문에 있길 비는 것은 인지상정 아니겠는가. 경제가 잘 돌아갈 때는 정작 사람들 입에 경제란 말이 오르내리지 않는다. 정치도 마찬가지고 민주주의도 매한가지다. 새삼 민주주의, 정치, 경제 따위 거대 담론의 열쇳말들이 무성한 것은 그만큼 우리 사회가 지금 바탕부터 흔들리는 위기상황임을 방증한다. ‘집밥 백선생’은 일상 속에서 사라지고 있는 집밥을 갈구하는 집단의식이 드러난 하나의 사회현상이다. 집밥보다 바깥밥에 익숙한 현실에서 화면으로나마 집밥에 대한 욕구를 채우고자 하는 대리만족이 바로 ‘집밥 백선생’ 현상을 낳았으리라.

    그의 구수하고 맛깔난 입담과 수더분한 인상도 흥행을 부추긴 요인일 수 있겠다.

    무엇보다 백선생 집밥의 특징이자 매력은 특별히 장을 볼 일 없이 냉장고에 쌓여 있는 식재료를 가지고 간편하게 조리할 수 있다는 점이다. 다들 한 번쯤 그의 특별할 것 없는 특별한 조리법을 흉내 내어 봤음직하다. 백선생 집밥은 빨리, 간편하게, 그리고 어떤 재료를 쓰든, 어떻게 조미하든 맛만 있으면 된다는, 이를테면 ‘현실주의 밥상’이랄까, 실용성에만 너무 치우친 듯한 아쉬움이 있다. 도대체 밥상의 원칙과 철학이 없다. 하긴 외식산업으로 떼돈을 벌었다는 그에게 무슨 밥상에 대한 철학씩이나 기대하랴.

    ‘시가 있는 밥상’ 서문에서 밝힌 대로 ‘밥상시인’으로 불리는 내 밥상에는 나름 몇 가지 기준과 원칙이 있다. 첫째, 우리 땅에서 난 식재료만 쓴다. 둘째, 최대한 열을 덜 가하고 조리 과정을 짧게 해서 재료의 원형과 성질을 지니도록 한다. 셋째, 화학조미료는 전혀 쓰지 않고 천연조미료도 되도록 적게 써서 주재료가 가지고 있는 본디 맛을 한껏 살린다는 것이다.

    ‘집’은 순수 우리말이지만 모이다, 또는 모으다라는 뜻을 가진 집(集, 輯)이란 한자에서 유래한 것이 아닌가, 추측해본다. 한글보다 한자가 먼저 쓰였던 사실로 미루어보면 영 터무니없는 생각만은 아니지 싶다. 그렇다면 집이란 때가 되면 (식구들이) 모이는 곳이 되겠는데, 집밥은 단지 ‘집에서 먹는 밥’을 넘어서 ‘식구들과 함께 먹는 밥’이라는, 다분히 인문학적 의미가 담긴 말로 다가온다.

    내가 차리는 밥상은 단순한 음식의 집합이 아니라 공동체의 일상을 복원하고자 하는 의지이자 염원의 결정체다. 건강한 공동체의 복원을 가능하게 하는 정신적 토대, 또는 매개체가 바로 시와 인문정신이다.

    일상의 상징인 밥상을 통한 시와 인문정신의 설파, 이것이 ‘밥상의 인문학’의 요체다.

    ‘시가 있는 밥상’을 내고 전국을 다니면서 ‘밥상의 인문학’이란 주제로 밥상의 인문학적 함의를 나름대로 풀어왔다. 청중에 따라 ‘밥상의 시학’ ‘밥상의 교육학’ ‘밥상의 정치학’ ‘밥상의 사회학’으로 변주하면서 지금까지 이십여 차례 강연했다.

    미리 말했다시피 너나없이 인문학을 들먹이는 것은 그만큼 인문학이 퇴조했다는 증거이며 따라서 인문학부흥운동이 어떤 형태로든 표출되는 건 자연스럽고 바람직한 현상이다. 그렇더라도 아무데나 인문학을 갖다 붙여 오히려 학문 체계를 어지럽히고 격을 떨어뜨리는 건 아닌지 조심스럽기도 하지만 사람살이와 결부되지 않은 학문이 어디 있으랴.

    또 한 해의 저물녘이다. 오늘만이라도 식구들과 오순도순 집밥을 나누며 모처럼 따뜻하고 평화로운 ‘저녁이 있는 삶’을 누려보는 건 어떨까. 모두의 집으로 가는 길에 졸시 한 편 부친다.

    손에 든 꽃이 무색해라// 일 마치고 돌아오는/ 사람을 맞는// 저기/ 꽃보다 환한// 불빛 -‘집’ 전문

    오인태 (시인·문학평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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