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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꽃보다 기자] 이슬기 기자의 영국 런던편(2)

오필리어가 있는 미술관, 클럽이 되다

  • 기사입력 : 2016-01-13 20:31: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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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출장에 휴가를 붙여 하루 온전히 내게 주어진 런던에서의 시간. 무엇을 할 것인지 고민하다 미술관에 가려고 마음먹었다. 런던에 많은 미술관·박물관이 있으니, 그 중에 어디를 택하느냐도 고민이 됐지만 이내 한 곳이 떠올랐다.

    이 곳을 택한 데에는 사연이 하나 있다. 대학 교양 수업으로 들었던 ‘서양 미술사’에서 우연히 보고, 맘에 들어했던 그림이 있었다. 그 그림은 라파엘 전파인 존 에버렛 밀레이(John Everett Millais·1829~1896)의 ‘오필리어(Ophelia)’. 맞다. 셰익스피어의 희곡 햄릿에 나오는 그 오필리어를 그린 그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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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존 에버렛 밀레이(John Everett Millais·1829~1896)의 ‘오필리어(Ophelia)’.

    아무런 지식이 없는 상태에서 본 그림인데 그림 속 주인공인 오필리어가 너무나도 아름답고 사실적으로 그려져 있어 한참동안 들여다봤다. 다음에 런던에 가면 꼭 이 그림을 보겠노라 다짐하면서 소장 미술관을 유심히 새겨놓고 있었다. ‘영국 테이트(TATE) 갤러리’.

    그러다 2012년 런던을 갔을 때 버려진 화력발전소를 현대미술관으로 탈바꿈시켜 지금은 세계적인 명소로 꼽히는 유명한 ‘테이트 모던’에 들렀다. ‘테이트’라는 말에 몇몇 전시를 보고 나서 밀레이의 ‘오필리어’를 찾아봤으나 어디에도 그 그림은 없었다. 나중에 알고보니, 이 그림은 ‘테이트 모던’이 아닌, ‘테이트 브리튼’이 소장하고 있었다.

    그러니까, 테이트라는 이름을 갖고 있는 미술관이 하나가 아니었던 것이다. 2000년을 기점으로 영국 런던 테이트 갤러리는 테이트 모던과 테이트 브리튼으로 나뉘었다. 세인트아이브스, 그리고 리버풀에도 테이트 갤러리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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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걷고 또 걸어 드디어 도착했다. 테이트 브리튼!

    이번에는 ‘테이트 브리튼’를 방문하기로 했다. 날씨도 별로 춥지 않겠다,버스 환승도 어려울 것 같아 멀어도 피카딜리 서커스에서 테이트브리튼이 있는 밀뱅크 지역까지 걸어가기로 했다. (머리가 나쁘면 몸이 고생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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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가까이에 와 선명하게 보이는 저 글자, 테이트 브리튼. 반갑다.

    가을 날씨를 느끼며 한국에도 많이 알려져 있는 펭귄북스도 우연히 보면서 걷고 걸어 당도한 테이트 브리튼. 테이트 모던과 다르게 기둥이 있는 파사드 덕에 좀 더 고전적인 느낌이 깃든 건물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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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테이트 브리튼에서 먼저 점심부터 해결하기. 가벼운 샌드위치와 음료를 팔고 있었는데, 음료도 테이트 갤러리들 내부에서 유통되는 것인지 테이트라고 적혀있었다.

    입장료는 감사하게도 무료. 원하는 만큼 기부금을 내는 식이다. 미술관 기념품을 많이 팔아주자는 생각을 갖고 1유로를 내고 지도만 하나 집어들었다. 그런데 이미 너무 많이 걸어 내 뱃속은 요동치고 있었다. ‘금강산도 식후경이라고!’ 몸이 외치는 소리를 들어주기로 하고 식당으로 향했다. 테이트에 유통하는 음료와 샌드위치로 배를 잠재웠다.

    본격적으로 탐방 시작. 길치·방향치인 내게 미술관 지도는 없어서는 안될 필수적인 요소다. (있어도 헤매기 때문에 참 힘들다.) 가장 이른 시대부터 천천히 둘러봤다. 박물관이나 미술관을 갈 때 마다 동선과 큐레이팅을 자연스레 눈여겨보게 된다. 테이트 브리튼은 전시장 바닥에 해당 전시장 작품 연대를 써놓아 방마다 시대를 건너는 마음으로 구경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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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전시실 입구 바닥에 해당 전시실 작품의 연대를 써놓아 시대를 옮겨다니는 기분으로 작품을 감상할 수 있다.
    높고 웅장한 회랑을 지나 양 옆으로 뻗어 있는 전시실. 방 한가득 영국 작가들의 작품들이 빼곡히 걸려있었다. 천천히 둘러보면 꽤나 오래 걸리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풍경화하면 떠오르는 터너와 콘스타블의 작품의 양도 방대해 어지러울 정도.
    목적을 다시 상기하고 일단 1800년대 미술을 전시한 전시실로 들어섰다. 밀레이의 작품이 전시된 곳이다. 크기가 별로 크지 않은 그림이지만 색감이 워낙 선명해 한눈에 들어왔다.

    밀레이 그림이 유명한 덕에 공책과 포트폴리오를 품고 지나가던 현지 고등학생들도 입을 벌리며 감탄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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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빽빽히 들어찬 그림들 사이에 밀레이의 그림 오필리아가 보인다. 학생들이 입을 다물지 못하며 오필리어 앞에서 한참동안이나 이야기를 나누다 발걸음을 옮겼다.
    다행히 사람이 그리 많지 않아 얼마간 이 그림을 소유한 것마냥 빤히 들여다 볼 수 있는 기회를 맞았다. 그어진 선도 없어 가까이 가까이 다가가 관찰했다. 플래시만 터트리지 않는다면 사진도 마음껏 찍을 수 있다. 오래돼 캔버스 위로 그어진 그림의 균열까지 속속들이 보이는 거리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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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오필리어다. 보고싶었던 오필리어. 유화인데도 불구하고 오필리어의 피부와 입은 드레스기 투명한 느낌이 드는 것이 신기하다. 묘한 분위기가 감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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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오필리어 한 밀레이의 사인.

    오필리어는 밀레이가 1852년 완성한 것으로 캔버스에 유화로 그린 작품이다. 자신의 아버지가 연인 햄릿에게 살해되자 강물에 몸을 던져 스스로 생을 마감하는 셰익스피어 희곡 ‘햄릿’의 한 장면을 그린 것이다.

    밀레이를 포함한 라파엘전파 화가들은 셰익스피어 문학의 영향을 많이 받았다고 한다. 특히 아름다우면서 비극적인 인물인 오필리어의 내용이 자주 그려졌는데 밀레이의 오필리어가 수작으로 꼽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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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배경이 되는 풀숲을 얼마나 꼼꼼하게 그렸는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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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모든 것을 놓아버린 듯한 오필리어의 마지막 모습. 후련한 것 같기도 하면서 완전히 펴지지 않은 미간은 아쉬움을 보여주는 듯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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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여러 꽃을 손에 쥐고 있는 오필리어. 꽃말을 모아서 그림을 해석한 것도 찾아볼 수 있다.

    밀레이는 오필리어가 물 속에 떠 있는 모습을 사실적으로 그리기 위해 모델(엘리자베스 시달)을 물을 가득 채운 욕조에 담가놓고 그렸으며, 잉글랜드 호그스밀 강가에서 넉달동안 있으면서 그림의 배경을 그렸다고 한다. 배경이 되는 풀숲에 다양한 식물들이 등장하고, 하나 하나 세밀히 표현될 수 있었던 이유다. (모델이 된 시달은 추운 가운데 욕조에 있느라 감기와 폐렴으로 고생했다는 이야기도 전해진다고!)

    다른 전시도 본 후, 미술관 기념품점에서 존 싱어 서전트의 ‘카네이션, 백합, 백합, 장미’그림에서 모티프를 얻은 비누와 엽서를 사고는 빠져나왔다. 벌써 오후라 아까보다 햇빛이 많이 노래져있었다. 서둘러 싱싱한 야채·고기로 유명한 버로우 마켓으로 향했다. 먹을 것이 많아서 차마 발걸음이 떨어지지 않는 곳이라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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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버로우 마켓 입구 모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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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버로우 마켓에서 올리브 오일과 올리브 절임을 판매하고 있는 모습. 하나같이 맛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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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수많은 조합의 올리브 절임.
    도착했을 때 이미 해가 뉘엿뉘엿 지고 있었다. 우리나라에서 찾기 어려운 트러플과 올리브들, 각종 향신료들을 맛보고 구경했다. 그러곤 다리가 아파 벤치에 앉아 쉬었다.

    문득 뭔가를 놓쳤다는 생각이 들었다. ‘내가 기념품점에서 산 존 싱어 서전트의 작품을 봤던가? 예쁘다고 기념품점에서 들여다 본 걸 내가 착각하고 있나?’ 영국작가는 아니지만 이 작가의 작품을 기념품점에서 현재 가장 중요하게 다루고 있었기 때문에 헷갈렸다. 작품을 본 기억이 없었다. ‘또 보러 오게 되려나?’ 당분간은 그러기 어려울 것 같았다.

    시간이 빠듯했지만 다시 되돌아가기로 했다. 옷까지 두터운데 이미 무거워진 가방을 들고 낑낑대면서 지하철을 갈아타고 걸어갔다. 미술관 닫는 시간이 6시. 30분 전인 5시 30분에 무사히 도착했다. 바로 직원을 붙잡고 물었다.

    “헉헉. 저기 존 싱어 서전트의 ‘카네이션, 백합, 백합, 장미’ 이 그림 어디 걸려있나요?”?
    “음, 잠시만요. (뒤적뒤적)”?
    “네. (아, 그래도 제 시간에 들어와서 다행이다)”
    “미안하지만 지금 이 그림은 전시 중이 아니네요. 특별전을 위해 준비하고 있는 상태입니다.”
    “네??????(말도 안 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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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다시 미술관으로 달려왔으나 끝내 보지 못한 그림. 존 싱어 서전트의 카네이션, 백합, 백합, 장미.

    내가 놓치고 지나친 것이 아니었다. 소장은 하고 있으나, 걸려 있지 않았던 것. 청천벽력 같은 소리였다. 얼마나 힘들여 다시왔는데…. 그 자리에 그대로 주저앉고 싶었다. ‘정말 영국까지 와서 손발이 고생을 하는구나’ 너무 서운해서 눈물이 찔끔 날 뻔 했지만 다시 한 번 보고싶었던 그림들을 훑자는 생각에 전시실로 씩씩하게 향했다. 그런데 이게 왠일? 오필리어가 있던 전시실이 분주하게 무언가를 정리하고 있었다.

    ‘아니 그럼 내가 잠시 다녀온 사이에 이벤트도 했단 말이야? 이것도 놓쳤네!’ 하고 생각하는 순간. 뭔가가 달라보였다. 정리하는 것이 아니라, 진열대를 놓고 팔 준비를 하는 것이었다. 밖에서는 어울리지 않는 음향을 조절하는 소리가 들렸다. ‘뭐지?’ 사람들이 왔다갔다 했다.

    “저기, 지금 저 쪽에서 무엇을 하려는 거죠?”
    “오늘 미술관이 늦게까지 문을 열거든요. 공연 준비하고 있어요.”
    “네? 정말요? 6시에 닫는 게 아니에요?”
    “10시 넘어서 닫지요.”

    참 여러 번 놀라는 날. 그러고 보니 문 닫을 시간이 5분여밖에 남지 않았는데 관람객들은 나갈 생각을 하지 않는 것 같았다. 되려 사람들이 몰려오기 시작했다. 1층 안내 데스크 쪽으로 내려가봤다. 아까는 없었던 새로운 팸플릿을 나눠주고 있었다. 특별한 오늘을 위한 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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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사람들이 몰려들고 있는 테이트 브리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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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사람들이 샴페인이나 맥주를 들고 자유롭게 미술관을 관람하고 있다. 곳곳에는 서서 이야기할 수 있도록 스탠딩 테이블도 마련돼 있다.

    오늘 행사는 ‘레이트 테이트(LATE TATE)’ 한 두 달에 한 번씩 이 곳의 폐장시간을 늦추고 공연과 미디어 아트 전시 등을 진행하는 날이었다. 오늘의 레이트 테이트 주제는 ‘바디(BODY)’. 오늘 열리는 포럼과 전시에 대해서도 설명해 놓았다. 눈이 반짝이기 시작했다. 참 멍청한 행동을 했다고 생각했는데, 둘도 없는 행운을 잡은 것으로 상황이 바뀌었다. 공연할 아티스트들의 목록을 보고는 주먹을 불끈 쥐었다. ‘Ady Suleiman(에디 슐레이먼)!!!!!’

    음색이 너무 마음에 들어서 최근까지 자주 들었던 가수라 정말 반가웠다. 런던에서의 마지막 밤을 이 목소리를 들으면서 보낸다면 좋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계획했던 홍차로 유명한 포트넘앤메이슨 방문, 야경이 아름답다고 소문난 스카이가든을 과감히 포기했다.

    포기한 보람이 있었다. 여태껏 한 번도 경험하지 못한 미술관의 모습이 펼쳐지기 시작했다. 넓고 높아 웅장한 중앙 회랑은 어두워졌고, 조명이 켜지기 시작했다. 밴드의 리허설 음향이 미술관을 휘감았다. 네 기둥이 모여 벽을 만든 곳은 몸을 주제로 하는 미디어 아트를 펼쳐보이는 배경이 됐다. 미술관이 젊은이들로 들어차기 시작했다. 이 변화가 실감나지 않아 몽환적인 느낌도 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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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돔 아래에서 펼쳐진 미디어 아트. 미술관을 버리는 공간 없이 알뜰히 쓰고 있었다.

    더 놀라운 것은 전시실 내부였다. 아까 오필리어가 걸려있던 전시실에는 음료수와 과자를 판매하는 매대가 설치되고 있던 중이었던 것이다. 이제는 사람들이 줄을 서서 샴페인과 맥주를 사들고 그림을 감상하고 있었다. ‘나도 빠질 수 없지!’ 혼자였지만 호기롭게 잔샴페인을 주문했다. 플라스틱잔이었지만 투명해서 런던을 마지막 밤을 기념하는 잔으로는 손색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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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그렇다면 나도 오필리어 앞에서 샴페인 한 잔을!
    살짝 상기된 얼굴로 좀 더 편안한 마음으로 전시실을 이리저리 오가는 기분은 묘했다. 무엇보다 신기한 건 이런 이벤트 자체였다. 자칫 손을 잘못 뻗거나 밀치면 그림에 음료가 쏟아질 수도 있을 텐데? 술을 마시고 기분이 좋으면 주정을 부를 수도 있을 텐데…. 오지랖 넓게 미술관 걱정을 해주고 있었지만 그림 앞에는 아까처럼 어떠한 제한도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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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미술관 바닥에 앉아 음악을 즐기고 있는 런더너들.

    전시실밖으로 나오자 이미 클럽과 같은 분위기로 사람들이 흥을 즐기고 있었다. 바닥에 편하게 앉아 담소를 나누기도 했고, 음악에 맞춰 춤을 추는 사람들도 있었다. 이런 게 문화충격인가. 몇몇 미술관에서 클럽 디제잉을 하는 것을 들었지만 테이트 모던이 아닌, 테이트 브리튼에서 이런 일이 벌어진다는 것이 재밌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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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사람이 바글바글, 클럽이 된 테이트 브리튼. 데이트를 하는 이들도 많이 보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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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에디 슐레이먼을 기다렸건만, 다른 가수가 와서 아쉬웠다.

    너무 많은 것을 바랐나. 끝까지 기다렸으나 에디 슐레이먼은 컨디션이 나빠져서 공연을 취소했고, 다른 가수의 노래로 상심한 마음을 달래고 나왔다. 계단에는 런던의 젊은이들이 빼곡히 앉아 밤을 느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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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영국에서의 마지막 밤, 테이트 브리튼을 나서는 길, 런던의 젊은이들이 미술관 계단에 앉아있다. 굿바이, 런던!

    결국 마켓을 제외하고는 하루종일 미술관에 있었던 셈이지만, 미술관의 다양한 모습을 목격할 수 있어 지루하지 않았다. 다른 곳에 가지 못한 아쉬움이 들지도 않았다. 재미난 이 행사를 또다른 곳에서, 한국에서도 접하게 되면 어떨까 상상하면서. 술 한잔 걸치고 고려청자나 조선백자를 감상하는 것도 근사하지 않을까. 예술품을 아꼈던 옛 선비들이 그랬을 것처럼.

    이슬기 기자 good@knnews.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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