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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년 03월 28일 (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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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가칼럼] 아직은 쓸 만해서 못 간다고 전해라- 정이식(아동문학가)

  • 기사입력 : 2016-01-22 07: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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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소한에 얼었던 얼음이 녹는다는 대한이 지나가며 겨울다운 겨울이 찾아왔다. 춥다. 출근길의 바람이 예사롭지 않을 것 같아 장롱 속에 걸어 둔 목도리를 꺼냈다. 딸아이가 새해 선물로 사주었지만, 이상기온으로 한 번도 사용하지 않은 목도리다. 목에 두르니 훈훈함이 정신까지 맑게 한다.

    동이 트려면 아직 이른 새벽에 폐지가 반쯤 담긴 손수레를 끌고 골목을 돌아가는 할머니의 뒷모습이 눈에 익는다. 같은 시간에 출근하며 골목에서 자주 마주치던 할머니다. 그런데 저 폐지, 저것 팔아도 라면 한 개 사기 힘들다. 폐지값이 많이 내렸기 때문이다. 값이 좋을 때인 3~4년 전에는 수레 가득 모으면 2만원쯤은 너끈히 손에 쥐었다. 갑자기 모든 고물값이 곤두박질치기 시작했다. 국제시세의 내림도 탓이지만 당사자들은 정부시책의 잘못이라고 입을 모은다. 영세 고물수집상에 특혜를 주던 면세를 거뒀기 때문이란다.

    보도를 내려오던 손수레가 경계석 턱에 부딪히며 옆으로 구른다. 우르르. 허술하게 담긴 폐지가 차도에 흩어졌다. 달려갔다. 손잡이에 할머니의 다리가 끼였다. “다치진 않았어요? 에구, 오늘 같은 날은 좀 쉬시지요.” 일으켜 앉히고 모로 누운 손수레를 바로 세웠다. “저기, 저기.” 내 말엔 대꾸도 없이 바람에 날아가는 종잇조각만 안타까워한다. 모두 주워 손수레에 넣고 날아가지 못하도록 발로 꾹꾹 밟았다. 손수레 종일 끌고 다녀도 가득 채우기가 쉽지 않다. 하루 4000원도 벌기 힘들다는 뜻이다. 더 젊은 사람들이 수집에 나서며 팔십 줄의 할머니는 그래서 고단하다. 남보다 먼저 골목을 훑어야 이나마도 모을 수 있다. 할머니 연세를 생각하니 구십의 노모가 계시는 나로선 남의 일 같지가 않다.

    그래도 그렇지. 오늘 날씨는 장난이 아니구먼. 저것 몽땅 팔아야 천 원 받기도 힘들 텐데…. 남에게 의지 않으려 새벽길의 손수레를 마다치 않는 할머니가 너무 애처롭게 보인다. 멀쩡한 몸뚱이로 무료급식소 찾아다니며 혜택은 하나도 놓치지 않는 사람도 있는데. 저렇게 열심히 살려는 할머니에겐 지원금으로 폐지값을 조금 더 주면 안 될까? 아니면 고물상에 주던 면세혜택을 다시 주던지. 성남인가 어디서는 일하지 않는 젊은이에게도 돈을 거저 준다던데. 쪼들려도 열심히 일하는 사람과 좋은 일자릴 찾는다며 몸이 성한데도 일 안 하는 사람. 누구를 도와주는 것이 국가가 해야 할 옳은 일인지. 정체성이 흔들림을 추위 탓으로 돌리기엔 내가 많이 부족하다.

    할머니는 다시 손수레를 끌고 길을 나섰다. “휭.” 갑자기 달려든 바람이 겹겹으로 목에 감은 스카프를 빼앗아 달아난다. “어어.” 할머니는 몇 걸음 따라가다 포기하고 돌아섰다. 바람은 벌써 스카프를 몰고 큰길을 건너갔다. 고슴도치처럼 웅크리며 몸을 떠는 할머니의 머리칼을 인정 없는 바람은 수세미처럼 헝클어 놓는다. 나도 모르게 목 언저리에 손이 갔다. 딸애의 눈망울이 잠시 스쳐 갔지만. 그래, 결심했어, 얼른 달려가서 목도리를 끌러 할머니 목에 둘러줬다.

    “복 많이 받으시고요. 아프지 말고 오래오래 사세요.” 손사래를 치는 할머니를 외면하고 한참을 가다 뒤돌아보니, 우두커니 바라보는 할머니의 눈에 글썽이는 눈물방울이 가로등 빛을 받아 반짝거린다. 80세에 저 세상에서 날 오라 하거든 아직은 쓸 만해서 못 간다고 전해라. 어디선가 유행하는 노랫소리가 들리는 듯하다. 그래. 아직은 더 사셔야 할 할머니. 훈훈한 정이 넘치는 좋은 세상 보기 전에는 절대로 못 간다고, 못 간다고 전하리다.

    정이식 (아동문학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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