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심재근의 우리땅 순례 (113) 산청 (2) 금서면 금수암 ~ 전 구형왕릉·류의태약수터

층층이 거대한 돌무더기, 구형왕이 잠들었을까

  • 기사입력 : 2016-02-24 07: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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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구형왕릉으로 전해지고 있는 돌무덤. 경사진 언덕 중간에 크고 작은 잡석이 층층이 쌓여 있다.


    입춘이 지났으니 봄이다. 봄은 생명을 주는 아름다운 계절이다. 양지바른 오두막 흙담 밑에 보라색 봄까치꽃이 찾아왔다. 사람은 지구의 역사에 비하면 찰나 같은 짧은 삶을 살다 간다. 그 순간에서 가장 어려운 것이 자식을 올곧은 사람으로 훈육하는 일이라 한다. 그래서 무자식이 상팔자라는 말도 있다. 가수 한대수씨가 오죽했으면 초등학교 3학년 딸 교육을 위해 뉴욕으로 이사를 간다고 했을까. 우리나라의 이상한 교육을 받지 않게 하려고 하는 것이 이유란다. 한씨는 한국 부모들, 특히 엄마들이 바뀌어야 한다고 했다. 아이를 부모 틀에 맞게 키우려 한다는 것이다.

    모 학교 학부모 대상 인문학 강의를 갔을 때 일이다. 학교장 인사말에서 학교에 와서 제발 싸우지 말라 했다. 자녀가 학교에서 혼이 났다면 자초지종을 들어보고 판단해야 하는데 무조건 항의부터 한다. 이런 일은 일부이겠지만 부모의 욕심으로 자식을 위한 옳은 사랑은 아니다. 자식의 미래를 밝혀주는 등불은 부모 스스로 노력하며 매사에 모범을 보이고 욕심을 내려놓고 한발 물러나 있어야 한다. 다른 사람의 행복의 가치는 내가 느끼는 행복의 가치하고 비교 대상이 아니다. 자신의 행복이나 자식의 행복은 따로 있다. 고난과 역경을 이겨내고 어려움에 맞설 수 있는 능력을 자연에서 배워야 한다. 그래서 다른 사람의 생각이나 감정을 이해하고 공감하는 방법을 익혀야 한다. 창의성과 올곧은 인성을 키우는 교육이야말로 나라의 미래 초석을 다지는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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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금수암 법당.

    ▲금수암·지리산둘레길 5구간 수철리

    대전 통영간 고속도로 산청 나들목에서 지리산 방향으로 필봉산을 따라 2㎞쯤 가면 금서면 수철리에 금수암이 있다. 금수암이 있는 곳은 옛날부터 산음이라 해서 지리산의 정기를 가득 받은 곳이다. 산청 동쪽 끝자락에 있는 암자를 일타스님께서 금수강산과 같은 곳에 있다고 해서 금수암이라 했다. 금수암은 산야초 건강법으로 유명하다. 몸과 마음을 수행해 사람의 인격을 완성하는 작은 가치관에서 출발하며 우주의 섭리를 인생에서 스스로 터득할 수 있도록 돕고자 만든 수행 도량이다. 마음을 살찌게 하고, 몸의 살을 빼는 사찰음식과 영혼을 점화시키는 차까지 만날 수 있다. 대안스님은 식품영양학을 전공해서 음식문화를 통해 바른 우주관을 확립했다고 한다. 사찰음식에는 한방과 산야초와 효소, 우리차를 아우르는 폭넓은 건강이 있다고 했다. 금수암은 두 번째 방문길이다. 봄이 아직 오지 않은 암자에는 고요와 정적만 있을 뿐 인기척은 없었다.

    암자 입구에 줄지어 있는 장독대가 반겨줬다. 암자 행사가 있을 때 가면 대안스님의 사찰음식을 맛볼 수 있다. 인근 수철리는 지리산 둘레길 5코스 산청 1구간 종점이다. 첩첩산중 마을에 지리산 둘레길이 열리면서 변화가 많이 일어났다. 동강에서 아름다운 계곡을 따라 산행하는 즐거움을 누리며 걷는 길로 도보꾼들에게는 오래전부터 인기가 높다. 수철리 시골마을에 걸맞지 않은 넓은 주차장과 편의시설, 막걸리를 파는 주막까지 생겼다. 찬바람이 가득한 과수원에는 초등학생 자녀를 데리고 나온 농부가 아들과 함께 나무를 자르고 있었다. 지리산 둘레길 계곡 주변에는 이국적인 펜션들이 있었다. 수철리에서 고동재와 쌍재를 거쳐 방곡마을을 연결하는 임도는 3월 초까지 눈이 녹지 않는다. 산길을 넘어 가려고 나섰다가 눈길 빙판에 길이 막혀 포기했다. 자동차도 겨울 자연에서는 내 두 발보다 못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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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덕양전.

    ▲덕양전·망경루·전 구형왕릉

    동의보감촌을 지나면 금서면 화계리 덕양전이다. 덕양전은 문에 ‘수리 중’이라는 안내문과 함께 잠겨 있었다. 높은 돌담 사이로 고요와 정적이 감도는 덕양전을 잠시 만났다. 가락국 제10대 왕인 구형왕과 왕비의 위패를 봉안하고 있는 곳이다. 삼국사기에 의하면 신라 법흥왕 19년(532년) 금관국의 왕 김구해가 왕비와 세 아들과 항복했다고 전한다.

    구형왕은 왕산 수정궁에서 생활하다 5년 후에 세상을 떠났는데 898년에 덕양전으로 이름이 바뀌었고, 1930년 지금 있는 자리로 옮긴 후 1991년 고쳐 지었다. 덕양전 인근에 2014년 가락국역사관이 생겼다. 역사관도 문이 닫혀 있었다. 입구에 가락국의 역사를 기록해 놓은 안내문이 있었다. 안내문에 있는 가락국 왕의 나이, 재위기간 등이 현재의 잣대로는 잘 이해가 되지 않아 수소문했더니 현재의 셈법과는 다르다고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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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가락국역사관.

    덕양전 담장을 따라 오래된 느티나무를 비켜 왕산(해발 923m) 방향으로 걸음을 옮기다 보면 망경루(望京樓) 현판이 붙은 정자가 있다. 현판의 글자 그대로 해석을 하면 서울을 바라보는 누각이라는 뜻이다. 정자의 주인공은 고려말 농은 민안부이다. 민안부는 고려가 멸망하자 강원도 두문동에 칩거한 72현 중의 한 사람인데 탄압을 피해 산음에 은거했다. 민안부는 매월 초하루와 보름에 왕산에 올라 개성 방향을 바라보며 임금을 그리워했다고 한다. 후대에 사람들이 왕산을 망경대라 하고 망경루를 지어 기렸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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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망경루.

    왕산 방향으로 발걸음을 옮기면 김유신이 활을 쏘았다는 곳에 근래에 표지석이 섰다. 그리 멀지 않은 곳에 가락국 제10대 구형왕릉으로 전해지고 있는 돌무덤이 있다. 구형왕의 본명은 김구해이며 양왕으로 김유신의 증조부이다. 521년 가락국의 왕이 돼 532년까지 12년 동안 재위했다. 이 돌무덤을 둘러싸고 종래에는 석탑이라는 설과 왕릉이라는 2가지 설이 있었다. 이곳에 왕명을 붙인 기록은 조선시대 문인인 홍의영의 ‘왕산심릉기’에 처음 보이는데 무덤의 서쪽에 왕산사라는 절이 있고 ‘왕산사기’에 구형왕릉이라 기록하고 있다고 했다. 경사진 언덕 중간에 크고 작은 잡석으로 일곱 층을 쌓은, 높이 7.15m짜리 거대한 돌무더기다. 주변에는 높이 1m 정도로 돌담이 둘러쳐 있다. 4층 정면에 작은 구멍이 뚫려 있는데, 벽으로 막혀 있다. 뒷면은 비탈진 경사를 그대로 이용해 만들었기 때문에 평지의 피라미드식 층단과는 차이가 있다. 돌무덤의 정상은 타원형을 이루고 있고 능 중앙에는 ‘가락국양왕릉’이라고 한자로 쓰인 비석이 서 있다. 그 주변에 석물들이 있다. 마을사람들은 돌무덤 경내에 풀이 자라지 않는다고 했다. 아마도 나라를 잃은 구형왕의 한이 서려 있어 그럴지도 모를 일이다. 사적 제214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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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왕산사지 석종형 부도.

    ▲왕산사지·류의태약수터

    왕산사지는 전 구형왕릉에서 임도나 등산로를 따라 류의태 약수터 방향 약 2㎞ 지점에 있다. ‘동국여지승람’에 있는 왕대암이라 하는 절터로 추정된다. 왕산사기에도 가락국 구형왕과 관련이 있는 것으로 나와 있다. 절터 안내문에 산위에 왕대가 있고 아래에 왕릉이 있으니 절이 있는 왕산이다 했다. 절터 곳곳에 석축이 일부 보이고 4곳의 건물터가 있었다. 건물의 초석과 돌담, 석축, 우물 등의 흔적이 남아 있고 비석의 대석이 흩어져 있었다. 조선시대의 석종형 부도 4기는 부근으로 이전했다. 절터의 규모나 흩어져 있는 기와와 그릇조각으로 미루어 절의 규모가 꽤 컸을 것이라는 짐작을 한다. 왕산사는 석종형 부도 4기로 보아 적어도 조선 어느 시대까지는 있었을 것으로 추측된다. 겨울 폐사지에서 삭막함과 적막감을 뒤로 하고 왕산 방향으로 가면 등산 리본이 어지럽게 달린 곳에 류의태약수터가 있다. 원래 왕산약수로, 여름에 차고 겨울에 따뜻한 한천수로, 장복하면 위장병을 다스린다고 한다. 눈이 내린 한겨울에도 김이 모락모락 난다고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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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류의태약수터.

    안내판에 류의태는 1516년(중종 11년) 신안군 상정마을에서 출생해서 허준의 스승이 됐다고 했다. ‘산청의 명소와 이야기’[손성모 지음. 경상대학교경남문화연구소. 2000년] 37편 한의학의 성지편에는 같은 내용에 조선 명종 때 명의라고 했다. 유이태는 조선 숙종 때 거창에서 출생해서 생초면 신연에서 의술 활동을 했다고 적혀 있다. 류의태는 구비문학과 민담으로 전해져 오고 있으며 소설동의보감, TV드라마 인물로 여겨진다.


    산청동의보감촌에도 허준 순례길은 있어도 류의태 순례길은 없다. 유의태는 기록이나 설화에도 없다. 류의태, 유이태, 유의태에 대한 고증과 정리가 필요하다. 한겨울 가뭄에도 콸콸 쏟아지는 왕산약수는 돌너덜 아래 자리 잡은 서출동류수이다. 서쪽에서 발원해 동쪽으로 흐르는 물이라는 뜻이다.

    (마산대 입학부처장·옛그늘문화유산답사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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