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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열린포럼] 자남산 여관에서 받은 단풍잎 한 장- 강맑실(사계절출판사 대표)

  • 기사입력 : 2016-03-11 07: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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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언니이, 기다릴게요~.” “그래에, 곧 갈게에~.”

    아니, 이것은 1961년에 만들어진 영화 ‘사랑방 손님과 어머니’의 옥희 말투 아닌가. 60년대의 서울 말씨와 흡사했다. 잠을 깨어 정신을 차려보니 내가 있는 곳은 개성공단의 컨테이너 숙소였다. 잠결에 아련히 들리던 말소리는 개성공단의 여성 노동자들이 주고받은 대화였다. 전날인 2005년 6월 6일, 나에겐 기적 같은 일이 있었다. 벽초 홍명희의 ‘임꺽정’ 저작권 사용료 지불건으로 ‘임꺽정’의 저작권자인 작가 홍석중(저자 홍명희의 손자) 선생을 만나러 개성공단에 도착한 것이다. 그것도 늘 꿈에 그리던 대로 일행들과 함께 직접 승합차를 몰고 도라산 남북출입사무소를 지나, 비무장지대를 지나, 북측 남북출입사무소에서 절차를 밟고 개성공단까지 갔다. 가는 내내 벅찬 마음에 자꾸만 눈물이 솟구쳤다.

    분단의 철조망을 치우고 홍석중 선생을 처음 만난 순간, 우리는 서로 뜨겁게 포옹한 채 말을 잃었다. ‘임꺽정’ 저작료 지불은 제작 부수를 밝히는 일이 우선이었다. 그걸 증명해 보이려고 20여 년간 제작 상황을 일일이 손으로 기록해온 열 권의 장부를 협상 테이블 위에 꺼내 놓았다. 그러나 홍석중 선생은 “강 대표의 말을 믿지 뭘 믿겠습니까”라는 말과 함께 그걸 들춰보지도 않았다. 신뢰의 끈이 이어지는 순간이었다.

    선죽교 근처의 자남산 여관 회의장에서 맺은 협상은 그렇게 우리 쪽 제안대로 순조롭게 이뤄졌다. 다음 해인 2006년 6월 5일, 남북 최초로 북측의 저작권자인 홍석중 선생과 남측의 출판권자가 평양에서 만나 ‘출판권 설정 계약’을 체결했다. 다른 나라들과는 출판 계약을 자유롭게 하면서 정작 한 민족끼리는 저작물을 주고받을 수도 없었고 저작물 계약은 상상조차 할 수 없었던 동굴 같은 세월의 빗장이 풀리는 순간이었다.

    개성의 4층짜리 자남산 여관은 남북 고위급 회담은 물론 수많은 민간 교류 차원의 실무협의가 이루어지던 곳이다. 2004년 경제특구로 만들어진 개성공단은 단순히 남한의 자본과 기술, 북한의 땅과 값싼 노동력이 만나 상품을 만들어내는 경제적 의미만을 지닌 곳이 아니다. 남북의 민간인들이 서로의 문화를 알아나가고 교류하고 협력하고 때로는 갈등을 풀어가면서 신뢰를 구축해 간, 어쩌면 평화통일을 연습하는 운동장 같은 곳이었는지 모른다. 2007년, 금강산 관광에 이은 개성 관광으로 남북은 반세기에 걸친 분단의 장벽 한쪽을 허물고 화해의 미소를 나눴다.

    정권 초기 대북 정책으로 평화통일의 한반도 신뢰 프로세스를 내세웠던 정부는 지난달 10일, 개성공단을 핵·미사일의 자금원이라고 지목하며 전격적으로 폐쇄했다. 대북정책에 누구보다도 강경했던 이명박 정권조차 천안함 사건이 터지고 연평도에 포탄이 떨어지는 상황에서도 개성공단 폐쇄라는 극단적 조처를 취하진 않았다. 왜 그랬을까. 개성공단 폐쇄는 어떤 효력도 발휘하지 못한 채 경제적으로든 군사적으로든 엄청난 긴장과 피해만을 안겨줄 뿐이기 때문이다. 개성공단을 폐쇄한다고 해서 북한의 핵·미사일 실험이 중단될 리는 더더구나 없다. 핵 실험을 중단시키거나 최소화하기 위해서는 북한을 붕괴시켜야 할 대상으로 보지 말고 상호 신뢰에 바탕을 둔 대화와 소통의 상대자로 대하는 자세에서부터 출발해야 하는 게 아닐까. “북한의 핵·미사일 능력이 갑자기 고도화된 건 개성공단에서 벌어들인 자금 때문이 아니라 2008년 이후 6자 회담이 한 번도 열리지 않았기 때문이다”라는 어느 글에서도 같은 생각을 읽을 수 있다. 남북은 개성에서 반드시 다시 만나야 한다. 개성공단이 지닌 평화통일을 향한 상징성을 무참히 짓밟은 채 시간을 보내서는 안 된다. 홍석중 선생이 자남산 여관 뜰에서 나에게 준 붉은 단풍잎은 10년이 지난 지금도 책갈피 속에서 퇴색하지 않고 그리움의 빛깔을 더해 가고 있다.

    강맑실 (사계절출판사 대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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