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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7년 11월 18일 (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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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길예담] (24) ‘창동허새비’ 이선관 시인 따라 걷는 마산 창동

평생 거닐던 그곳, 이웃과 시대의 고뇌가 묻어있네
뇌성마비로 몸이 불편했던 시인
그는 세계·민족·이웃을 걱정하는 ‘보통시민’이 되자고 외쳤다

  • 기사입력 : 2016-03-17 22: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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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그를 만나기 전 두꺼운 시 전집으로 만났다. 이 사람이 하늘로 떠난 지 꼭 10년이 되던 해인 2015년, 작고 10주년을 기념하며 시전집이 나왔다. 이선관시인추모모임이 나서 불휘미디어에서 낸 책이다. 경남대학교 배대화 교수, 우무석 시인 등이 힘써 만들었다. 이 책은 한평생 쓴 시를 그러모을 가치가 있는 사람이라는 뜻이라고 읽혔다. 한 장 한 장 넘기면서 깨달았다. 왜 사람들이 그의 시를 모아 낼 생각을 했는지. 그는 자신의 감정뿐 아니라 사회에 대한 목소리를 내는 시인이었다.

    고 이선관 시인의 이야기다. 그는 태어날 때 백일해를 앓고선 한약을 잘못 먹고 뇌성마비를 앓아 몸이 불편했고, 말도 어눌했다. 기형으로 태어난 자신의 삶에 대해서도 고찰하고, 스스로 ‘나는 시인인가’를 끊임없이 성찰했다. 부단한 세신만으로도 충분히 기억해야 할 이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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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슬기 기자가 창동예술촌 아고라광장 앞에 있는 이선관 시인 유품 전시관 입구에 서 있다. 입구에 그려진 시인의 캐리커처가 익살스런 표정을 짓고 있다./성승건 기자/

    그러나 그의 가치는 또 다른 시에서 빛난다. 그는 환경과 민주주의, 장애인권 등 사회문제 전반에 폭넓은 관심을 갖고 무엇이 옳고 그른지 이야기하는 시를 썼다. 환경이 이렇게 심하게 오염되었노라고, 3·15의거를 기억하자고, 5·18민주항쟁이 일어났다고 널리 알리고 기록하는 사람이었다. 지역 현안에 목소리를 직접적으로 내면서 그른 것에 저항하는 이가 얼마나 될까. 고등학교 교과서에서 보고 난 이후 잊었던 ‘참여시’라는 명칭이 다시 떠오른 때였다.

    지금은 보기 드문 사람, 그래서 더 사람들이 그리워할는지도 모른다. 살아 있었다면 그는 어떤 목소리를 내고 있었을까 궁금한 이다. 5.7㎝의 목베개 같은 두꺼운 책을 한두 장씩 넘겨보게 된 이유가 여기에 있다.

    넘겨 보다 ‘보통시민’이라는 시에서 멈췄다. 그가 1980년 7월 1일 경남신문에 발표한 것이라고 기록돼 있었다. 반가웠다. 여기서 그는 세계를, 민족을, 가정을, 이웃을 걱정했다. 그러면서도 늘 불안한 마음을 감추지 못하는 부끄러움, 머쓱한 마음에 춤을 추는 자신의 모습을 고백하고 있었다. 8년 후 1988년 7월 29일 경남신문 노동쟁의 특보 3호에서도 부마항쟁 진상특위를 ‘가장 민주언론의 방법’으로 선봉장이 돼야 한다고 꾸짖었으며, ‘사람으로 살아가아 한다’고 거듭해서 주문했다.

    몇 편의 글에 반가움을 느끼고, 마치 언론사 선배를 만나 가르침을 받은 것 같은 마음에 고마움을 느꼈다. 그 덕에 일어섰다. 그가 그렇게 애정하고 노래하던 창동 네거리에 섰다. 그가 평생 살고 거닐며 시의 배경으로 삼던 창동을 되짚어보려 했다. 마침 3·1운동의 정신을 이어받아 신문을 만들겠다는 뜻에서 경남신문이 설립한 3월 1일, 창간 70주년을 맞는 날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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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선관 시인의 시 ‘보통시민’이 실린 1980년 7월 1일자 경남신문.



    -보통시민-



    스산한 오후

    이사한 지 6년 만인데

    오늘도 구철길을 따라

    시내로 향하는 내 발걸음은

    뜬구름을 딛고 가는 것처럼 불안하다



    문득 문득

    세계를 걱정하고 민족을 생각하고

    가정을 고민하고

    이웃을 사랑하고

    그렇게 하다가, 하다가, 하다가



    사치다, 방탕이다, 기만이다, 허구다,

    사기다, 위선이다, 육백이다, 허무다,

    주택복권이 될 수 없음을 알고 알다가

    바보다, 천치다, 축구다, 버꾸기다.



    어느새 시내로 나온 나는

    창동 십자로에 서서

    처용가를 부른다

    처용춤을 춘다.



    나는 언제까지나

    보통시민



    사람들은 그를 창동백작, 창동허새비 등 몇 가지 별명으로 불렀다. 사람을 지칭할 때 어떤 지명을 담아주는 건 적어도 그 지역과 떼려야 뗄 수 없는 관계라는 것이다. 그곳 하면 이 사람이 생각나고, 이 사람을 논하면 그곳이 생각날 때 붙인다. 그러니 뒤에 붙는 명사가 달라져도, 이선관 시인을 빼놓고는 창동을 제대로 이야기할 수 없었다고 보면 되지 않을까.

    창동 골목을 누비고 다닌 이선관 시인의 면모는 사람들의 증언과 시에서 여실히 드러난다. 그는 나고 자란 창동에서 호흡하고 고민하고, 걸었다. 자신뿐 아니라 시대를, 이웃을 생각했다.

    볕 좋은 오후 창동네거리에 섰다. 네거리 인근 빌딩 3층에서 이사를 하고 있어 이삿짐센터 차가 골목을 크게 막았다. 탁 트인 네거리 풍경을 보는 데는 실패했다. 극심한 쇠퇴를 겪었던 지난 몇 년보다 창동예술촌을 조성한 지금은 유동인구가 꽤 늘었다. 그러나 시인이 바라봤을 창동은 지금과 다르다. 별다른 노력 없이도 마산의 중심지로 지금보다 훨씬 많은 사람들이 몰려 북적거렸을 그때를 상상한다. 사람과 현상과 자아와 시간이 교차하고 있는 창동네거리. 시인은 몰려드는 인파 속에 떨어져 관찰하거나 때로는 섞이면서 시세계를 쌓아나갔을 것이다. 사람들이 나고든다. 한 사람 한 사람 보통시민임을 안다.

    창동 네거리에서 창동예술촌 골목을 따라 올라가면 나오는 창동 아고라 광장을 등지고 보이는 첫 번째 공간은 이선관 시인을 추모하는 공간이 됐다. 원래는 입주작가의 공간이었으나 창동시인의 공간 하나 없는 것을 안타깝게 여긴 김경년 창동해설사가 입주작가가 나간 뒤, 빈 공간을 활용하자는 제안을 해 이 시인을 기리는 공간으로 자리하게 됐다. 이곳에는 매년 열리는 추모모임 행사 때 쓰인 시 인쇄물과 시인의 유품, 동서화랑 고 송인식 관장이 내놓은 이선관 시인의 사진 등이 전시돼 있다. 아직 겨울이라 내내 열어놓지는 않으나 봄에는 늘 열어서 창동을 찾는 사람들이 이선관 시인에 대해 알 수 있게 할 예정이다.

    안을 둘러보고 있으니 창동을 찾은 시민들의 발걸음이 이어졌다. 창동의 변화된 모습을 보기 위해 찾았다는 조용경(67·함안군 산인면), 안상희(63) 부부는 이 공간이 꼭 필요한 곳이라고 강조했다. “문화가 없으면 어떻게 사람이 살 수 있을까. 여기엔 자료도 있고, 옛 사진들도 볼 수 있어서 참 좋지요. 이게 사람다운 거지요. 소박하고, 진심이 느껴지는 사람이라 좋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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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추모공간에서 나와 조금만 위쪽으로 발걸음을 옮기면 천상병 시인 등과 어깨를 나란히 한 시인의 동판이 있다. 좀 더 올라가면 마산만 오염을 고발한 시인의 대표작 ‘독수대’가 쓰인 동판도 찾아볼 수 있다.


    창동 골목에서 그를 떠올릴 수 있는 장소는 여기뿐만이 아니다. 그가 자주 드나들어 그를 아주 잘 아는 사람들이 있는 곳, ‘만초집’에 갔다. 만초집은 이선관 시인이 생전 젊은 시절부터 세상을 뜨기 전까지 출근하다시피 들렀던 곳이다.

    엄학자(73)씨와 조남륭(79)씨가 운영하는 만초는 40년 이상 예인들의 사랑방이 되다시피한 역사를 자랑한다. 들어서자마자 왼쪽 벽면을 가득 채운 사진들이 말해주고 있다. 자리를 세 번 옮겼으나 그때마다 사람들은 발걸음을 따라 옮겼고, 그중 하나가 이선관 시인이었다. 부부는 주거니 받거니 이선관 시인, 그리고 어울렸던 이들에 대한 이야기를 풀어놨다.

    “착한 사람이지 뭐. 그리고 특히 우리 할매랑 잘 지냈어, 나이가 비슷했거든. 마음에 드는 분이랑 잘되라고 우리 가게를 비워준 적도 있었지. 나랑 선생들은 같이 등산 가고, 할매는 친정 보내고. 너거끼리 장사 한번 해보라고 말이야. 그 뒤로 얼마 안 돼서 결혼에 성공했어.”

    엄씨도 말을 잇는다. “말하기도 힘들어서 약간 웃음소리가 특이했는데 늘 ‘헤헤헤’하고 잘 웃었어요. 일할 사람 구한다 하면 좋은 사람 소개시켜주기도 하고. 마지막 아플 때 마산의료원에 들여다보기도 했지요. 선후배들이랑 어울려서 막걸리도 참 많이 마시고, 청하도 한 병씩 하고 그랬는데….”

    부부의 눈빛과 목소리에서 그리움이 깊었다. 그 덕에 한 번도 보지 못했지만 시인이 그리워지려 했다. ‘보통시민’이 되자 외치던 그 사람이. 그리움을 그냥 낭비하지는 말자 생각했다. 보통시민이 되는 모습을 보여주자 생각했다. 다시 창동 네거리에 선다. ‘보통시민’ 바이러스가 전염되기를 바라면서.

    이슬기 기자 good@knnews.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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