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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꽃기자] 다시쓰는 7번 국도 (4) 강릉/세 여자 이야기

  • 기사입력 : 2016-03-18 13:45: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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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사회부 김언진
     
    아침이 되자 그 어떤 인위적인 개입 없이 말 그대로 지저귀는 산새소리에 절로 눈이 떠졌다. (물론 눈만 떴고 몸은 덜 깼지만.)

    날이 밝았으나 방바닥은 여전히 열기를 간직하고 있었기 때문에 내 몸도 변함없이 눌러붙은 상태로 세월아 네월아 노래를 부르며 빈둥거렸다. 그렇게 영원히 떨어지지 않을 것 같은 바닥과 나 사이는 유경선배가 가져다준 강원도 찰옥수수에 의해 분리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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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샛노란 찰옥수수. 이 사이에 옥수수 알이 끼여서 한참동안 씁씁댔다.

    방문을 열어보니 쨍한 햇빛에 쌓인 눈은 흐물거리고 있었다. 이제는 차를 몰고 갈 수 있겠다는 안도감이 들었다. 본격적으로 강릉을 둘러보기로 했다. 코스는 전날밤 스님이 추천해주신 곳 위주로.

    썩 좋지 않은 기억력 탓에 희미해진 머릿속을 더듬어보니 강릉에 온 것은 이번이 네번째다. 네번 모두 다른 목적과 명확한 이유가 있었기 때문에 내게 강릉은 네가지의 다른 모습이 있다.

    내 생에 첫번째 강릉은 스물 한 살 여름, 고등학교 동창 다섯이 함께 간 경포해수욕장. 여름밤의 경포해변은 젊은 혈기를 주체하지 못하고 방황하는 불나방들로 가득하다. 오늘이 마지막인 것처럼 먹고 마시는 청춘들, 이리저리 이성에게 '까대기'를 치는 중생들로 말이다. 그리고 우리도 청춘으로서의 책무(?)를 다하기 위해 돗자리를 펴고 앉아 미리 사온 맥주와 안주를 늘어놓고 왁자지껄 떠들고 있으면 우리 또래의 젊은 남성들이 어떤 목적을 가득 담은 눈빛으로 다가와 작업을 걸었다. 나를 포함해서(중요★) 우리 다섯은 꽤 반반한 외모를 가졌기 때문에 합석요청은 매우 잦았다. 적당히 튕겨주기도 하고, 시시껄렁한 농담을 건네며 밤의 열기를 이어갔다. 하지만 오래가지는 못했다.

    우리 다섯은 적당히 불건전한 삶을 늘 동경해왔다. 하지만 고기도 먹어본 놈이 맛을 알고, 일탈도 해본 놈이 하는 거였다. 일탈이라면 고작 석식시간에 실내화를 신고 교문 밖으로 나가 대동백화점 푸트코트에 가서 돼지국밥을 사먹고 오는 것이 다였던 우리가 퍽이나. 그날 밤도 우리는 굳이 자기네 숙소에 가서 술을 더 먹자고 졸라대는 남자 다섯명 무리를 쫓아보내고선, 우리끼리 무지 재밌게 놀았다. 모래사장에서 혼신을 다한 멀리뛰기와 신발 멀리던지기 같은 말도 안되는 놀이를 하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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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밝은 표정의 슬기선배와는 달리 곧 얼어 죽을 것 같은 나.

    두번째 강릉은 그로부터 6개월 뒤 갓 스물 두 살이 된 겨울. 마음이 맞는 대학동기와 일주일동안 전국 기차여행을 다니며 마지막으로 찾은 곳이었다. 내 키만한 배낭을 메고 찜질방을 전전하며 맛집만을 찾아다녔던 패기넘치는 여행. 안동에서 밤기차를 타고 와 강릉 시내의 어느 찜질방에 누운 우리는 앞으로 '먹고 살 걱정'을 했다.

    우리는 둘 다 법을 공부했지만, 가고 싶은 길은 확연히 달랐다. 친구는 외국에 나가 일을하고 싶어 캐나다로 워킹홀리데이를 갈 준비를 했고, 나는 학기를 마치면 사법고시를 준비하기 위해 휴학하고 고시촌으로 들어갈 생각이었다. 우리는 서로의 앞날을 진심으로 응원했다. 우리는 다음날 흐린 하늘 사이를 비집고 뜨는 해를 바라보며 꿈을 이룬 우리의 모습이 담긴 허세 가득한 상상을 했더랬다.(결과적으로 둘 다 지금은 다른 일을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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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힘조절에 실패해서 셀카봉이 부러졌다. 언무룩.

    세번째 강릉은 스물 다섯 봄. 그때 나는 마지막 도전이라고 결심한 시험에서 한끗차이로 낙방하고 과감하게 고시생 생활을 청산했다. 우선 복학은 했지만 이뤄야할 목표가 사라진 나는 정처없이 표류했다. 게다가 3년동안 친구들은 사회로 나가기 위해 출발선 앞에 서서 신발끈을 고쳐매고 있었지만, 나는 어두운 골방에서 연필만 깎고 있었다.

    당장 내년이면 취업 준비를 해야했는데 나는 그 흔한 '스펙'이 아무것도 없었고, 무엇을 하고 싶은지 조차 몰랐다. 침전물 같이 가라앉기만 하던 어느 날 친하게 지내던 한 언니가 갑작스러운 강릉여행을 제안했다. 언니와 안목해변에 가서 바다가 잘 보이는 카페에 앉아 커피를 마시며 이야기를 했다. 언니는 내가 아무런 가치도 없는 쓸모없는 것들이라 여기던 시간들을 찬찬히 되짚어주며 그 속에 숨겨져 있던 의미를 끄집어 내 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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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커피 성지라 불리는 카페 테라로사. 아침에 일어나면 연료를 채우듯 커피를 한 잔 마셔야 정신이 드는 나를 위해 첫 일정을 카페로 시작해준 선배들에게 감사의 인사를 전한다.
     
    그리고 이번 네번째 강릉. 내 생년월일로 사주풀이를 해보면 물(水)이 많단다.(맞는지는 모르겠지만.) 뭐 어쨌든 그래서인지 나는 물 있는 곳을 매우 좋아한다.

    대학교 다닐때 캠퍼스 한 가운데에 엄청 큰 호수가 있었고, 입사 1년차 때는 주남저수지(이제 주남호로 이름을 바꾼다지만 아직은 주남저수지가 입에 더 잘붙는다.)나 낙동강을 뻔질나게 드나들었다. 스트레스가 쌓이면 제주도로 훌쩍 여행을 떠나 바닷가에 누워 망중한을 즐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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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볕이 좋은 선교장에서 꽃기자 셋.

    이번 강릉도 물을 많이 만나 좋았다. 경포대에 올라 한적한 경포호를 바라보고 있는 것도 좋았고, 비록 칼바람이 불었지만 송정해변의 파도소리도 마음속에 밀려와 알알이 박혔다. 그리고 햇볕이 따뜻하게 드는 선교장에 앉아 축축하게 젖은 마음을 잘 말려 차곡차곡 개켜두기도 했고. 무엇보다 선배들과의 소소한 담소가 제일 좋았다.

    여행이 무르익어갈수록 창원에서부터 거추장스럽게 달고 온 잡스러운 근심들이 하나 둘씩 떨어져나갔다. 나는 한결 가벼워진 마음으로 다시 일상으로 복귀할 준비를 했다.

    김언진 기자 hope@knnews.co.kr
     
     
    ▲문화부 이슬기
     
    청학사에서 아침을 든든히 챙겨먹고 길을 나섰다. 커피로 유명한 테라로사에서 대기번호를 받아가며 맛난 모닝커피를 마신 뒤 본격적으로 강릉 투어에 나섰다. 전날밤 우리를 앉혀놓고 스님께서 직접 강릉에 왔으면 가 봐야할 곳을 넣어 코스를 짜 주셨으므로, 그 중 몇 곳을 가보기로 한 것이다.

    먼저 도달한 곳은 송정 바다, 여기서 바다의 눈을 보고선 경포대로 향했다. 바다를 일컫는 경포대 말고, 강릉 경포호수가 다 내려다보이는 정자. 그리고는 발걸음을 옮겨 선교장에 도착했다. 선교장은 처음 가 봤다. 이름은 낯익었는데 강릉에 있는 것인 줄도 몰랐다. 차에서 내리니 눈에 한옥이 한가득 들어왔다. 내가 좋아할 곳임을 직감했다. 그리고 이 풍경을 하나같이 좋아할 사람들이 생각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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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스님이 써 주신 코스. 주머니에 넣고 다니느라 꼬깃해졌다. 우리는 이 중 4곳을 가는 쾌거를 이뤘다.

    나는 대학 때 사학을 전공했다. 정말 좋은 교수님들이 열정을 쏟아 수업을 해주셨는데, 부끄럽게도 이제 거의 다 휘발돼 사학도로서 마땅히 가져야 할 지식이 별로 남아있지 않다. (사학도에겐 릫임오군란이 몇 년에 일어났냐릮는 등의 질문은 가혹하다. 몇 년도에 어떤 사건이 일어났는지를 암기하는 수업이 거의 없다. 물론 알고 있을 것을 바탕으로 수업을 하시긴 하지만.)

    그런 내게 대학 동기들인 사학 친구들은 여전히 어떤 의미에서 '스승'이 돼 주는 사람들이다. 다들 멀리 떨어져 있어 자주 못 보지만 카톡채팅방에서 하루종일 이야기를 이어간다. 회사를 다니기도 하고, 대학원을 다니기도 하고, 시험을 준비하고 있는 친구들까지 모두 다른 상황에 놓여있지만 다들 관심사가 비슷한 구석이 있어서 대화가 유쾌하다. 현재 나누고 있는 이 이야기들로도 힘을 얻지만, 살면서 친구들과의 대학 때 추억은 삶의 뼈대가 돼 줬다.
     
    우리는 매해 두 번 공식적인 과 답사를 떠났다. 교수님들도 함께 가셨다. 답사반이 먼저 사전답사를 하고 프로그램을 준비한 뒤, 일정에 맞춰 다녔다. 답사반은 답사장소에 대한 공부를 해서 답사지를 만들어 나눠줬고 돌아가면서 설명도 했다. 그러고 나면 교수님들께서 여기에 말씀을 덧붙여 주시기도 했다.

    직접 유적지를 둘러보는 것도 좋았지만 친구들과 도심밖에서 신나게 뛰어노는(정말 뛰어놀았다) 것이 좋았다. 벌레 물릴 것은 생각도 못하고 잔디밭에 그대로 누워 뒹굴기도 했고, 고인돌 유적지를 뛰어다녔으며 그네, 널뛰기 등 민속촌의 체험도 모조리 했다.

    당연히 배는 자주 고플 수밖에 없었고, 나는 교수님이 설명하시는데 그 와중에 김밥 도시락을 얼른 뜯고 싶은 마음에 고무줄을 팅기다가 그만 김밥을 엎는 대참사를 치른 적도 있다. 전북 고창 전봉준 생가를 잊을 수 없는 이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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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전북 고창 고인돌유적지에서 친구들과 드러누웠던 때. 무려 지금으로부터 8년 전, 21살 꼬꼬마 시절의 일이다.

    선교장은 그 때를 떠올리기에 충분한 곳이었다. 1816년, 지금으로부터 딱 200년 전 지어진 '활래정'이 인상적이었다. '맑은 물이 끊임없이 들어온다'는 뜻을 가진 정자로 연지를 만들고, 가운데는 섬을 만들어 놓았다. 푸른 잎들이 지고, 갈빛으로 마른 연꽃대만이 언 연못을 채우고 있는데도 그 고즈넉함은 압도적이었다.

    날이 풀린 뒤에 보여줄 경치도 궁금했다. 미리 예약하면 안에 들어가 볼 수도 있는 것 같았다. 활래정을 지나 발길 닿는 대로 본채와 별당들을 지났다. 나는 답사반이 아니었지만 예전의 기억을 살려 안내지도에 나와 있는 설명을 언진이와 유경선배에게 읽어줬다. 답사 때 생각이 물씬 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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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816년, 지금으로부터 200년 전 지어진 활래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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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답사 때를 생각하며 선교장에서 안내지도의 설명을 읽어주고 있다.
     
    셋은 가장 안쪽에 있는 한국전통문화체험관 마루에 걸터 앉았다. 볕이 따사로웠다. 누워서 자고싶은 마음이 굴뚝같았다. 차마 그러진 못했지만 비타민 D를 들이마시는 기분으로 꿉꿉한 감정들을 말렸다. 대학 때를 생각하니 더 뽀송뽀송한 기분이 들었다. 잘 말린 마음을 안고 활래정을 지나 밖으로 나왔다.

    한복을 입고 답사를 한 번 떠나보면 어떻겠냐는 친구들의 말이 생각났다. 연꽃이 만개한 때, 활래정 안에서 한복을 입고 차를 마시고 있는 사람들이 그려졌다. 그 속에 나를 끼워넣었다.

    이슬기 기자 good@knnews.co.kr
     
     
    ▲방송인터넷부 김유경
     
    '눈밭에 쓴 편지(雪中訪友人不遇)'라는 한시가 있다.
    고려시대 이규보가 눈이 많이 내린 어느 날 말에 올라타 친구를 찾아갔다가 쓴 시다.
     
    눈밭에 쓴 편지(雪中訪友人不遇)
     
    눈빛이 종이보다 새하얗기에 (雪色白於紙)
    채찍 들어 이름 석 자 써 두고 가니 (擧鞭書姓字)
    바람아 부디 눈을 쓸지 말고 (莫敎風掃地)
    주인이 돌아오기 기다려다오. (好待主人至)
     
    눈을 뚫고 찾아갔지만 친구는 출타 중이다.
    이규보는 발길을 되돌려 나오다가 집 앞에 쌓인 하얀 눈을 발견했다.
    채찍을 들어 그 위에 자신의 이름 석 자를 썼다. 그리고 바람에게 당부했다.
    주인이 돌아와서 볼 수 있도록 내 이름을 덮어버리지 말아 달라고.
     
    이 시는 내게 아름다움이 무엇인지 알려줬다.
    눈 위에 이름을 쓰고 떠난다는 것, 그것이 부디 온전히 남아있기를 바람에게 당부한다는 것.
    그리고 그러한 사실을 시(詩)로 남길 수 있는 한 남자의 순정한 마음까지.
     
    무엇보다 내 가슴을 흔드는 부분은 행간에 숨어 있는, 이규보가 떠난 후의 장면이다.
    바람은 잠잠하게 집주인이 돌아오길 기다려줬을까?
    아니면 함박눈이 펑펑내려 흔적을 모두 지워버렸을까?
    그도 아니면 집주인이 집에 당도하기 전에 눈이 모두 녹아버렸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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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강릉 송정바다를 배경으로 한 컷. 백사장에 눈이 이불처럼 덮여 있는 모습이 아름다웠다.

    강릉은 눈의 나라였다.
    송정바다와 경포호수에서 솜이불처럼 소복히 내려앉은 함박눈을 봤고
    선교장을 유유히 가로지르며, 또 테라로사에서 향기로운 커피를 마시며 폭폭 쌓인 싸락눈을 봤다.
    겨울바람은 기운찼고, 흰눈의 결정은 보석처럼 영롱했다.
    그때마다 충동이 일었다.
    뭐라도 써놓고 갈까?
    이 눈이 모두 종이라면, 거기에 단 한문장만 쓸 수 있다면, 나는 무엇을 적을 것인가?
    차례차례 많은 것들이 스쳤다.
    내가 잡지 못해서 후회했던 것들, 잡아서 후회했던 것들.
    그 속을 미로처럼 헤맸던, 그리고 지금도 여전히 헤매는 어리석은 마음들.
    뭐라도 한번 써보려 몇번이나 마음을 냈지만 나는 결국 아무것도 적지 못했다.
     
    왜냐고?
    글쎄. 할말이 너무 많아서, 라고 해두자.
    그러므로 나는 '눈밭에 쓴 편지'가 아니라 '눈밭에 쓰려던 편지'를 강릉에 두고 왔다.
    그것은 경포대에, 활래정에, 테라로사의 빈 테이블 위에 오도카니 놓여있을 것이다.
    그러나 쓰지 않았으니 누군가에게 전달될 일도, 내게 되돌아올 일도 없겠지.
    무릇, 편지란 그래야하지 않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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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경포대에 올라 내려다본 경포호수.

    그런데 문득, 눈 이야기를 쓰는 지금은 어느덧 봄꽃이 삐죽삐죽 봉오리를 터트리는 3월 중순.
    이제 이 여행기도 막판을 향해 가고 있다. 마지막으로 이규보 흉내를 어설프게 내본다.
     
    눈빛이 종이보다 새하얗기에
    아무것도 남기지 않고 가니
    봄바람아 부디 눈을 녹이지 말고
    이 마음 돌아오기 기다려다오.
     
    김유경 기자 bora@knnews.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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