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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남시론] ‘응답하라 1974’ 그때의 도전과 열정으로- 이장훈(한국산업단지공단 경남지역본부장)

  • 기사입력 : 2016-03-23 07: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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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얼마 전 끝난 ‘응팔(응답하라 1988)’ 시리즈가 다시 우리를 복고 신드롬에 젖게 했다. 제목을 보고 ‘응답하라’ 시리즈가 1997, 1994, 1988로 이어졌는데, 건너뛰어도 너무 뛴 것 아닌가? 의아해할 수도 있을 것이다. 응답하라 시리즈는 아니고 통합 전 창원 이야기를 하려고 한다.

    기억되는 창원의 과거 모습은 창원에 언제 처음 왔느냐에 따라 제각각일 것이다. 필자가 대학을 마치고 처음 이곳에 왔을 때는 응팔의 시대배경이 된 1980년대였다. 도로는 차들이 한산했고, 회사에서 바라본 창원광장쪽 중심상업지구에는 기껏해야 삼일상가와 1~2개 상가건물이 들어서 있을 뿐이었다. 그러나 그때도 이미 현재와 같이 창원대로를 중심으로 남쪽은 산업단지, 북쪽은 배후도시로 지금의 모습을 갖추고 있었다.

    창원은 1974년 이전까지는 산으로 둘러싸인 분지로 인근 도시와 차단된 전형적인 촌락이었다. 조그마하던 시골마을이 현재의 모습으로 바뀌게 된 것은 1974년 정부가 중화학공업을 육성하기 위해 창원을 ‘산업기지개발구역’(현재 창원국가산업단지)으로 지정하면서부터이다.

    1974년 이후 40년의 시간이 지나는 동안 이곳에 함께 살아온 우리 이웃들은 어떤 모습일까? 창원단지 개발이라는 명분 아래 조상 대대로 살았던 고향 문전옥답을 내어주고 낯선 곳에 보금자리를 튼 사람들도 있고, 산업단지와 배후도시 건설 과정에서 묵을 곳이 없어 추운 공사장에서 겨울을 났던 이들도 있을 것이다. 그리고 가장 흔한 경우는 새로운 일자리를 찾아 창원을 새로운 고향 삼아 정착하게 된 경우일 것이다. 각자 추억하는 창원의 모습은 다르지만, 어느덧 창원을 제2의 고향 삼아 살고 있는 우리 이웃들이다.

    모든 인생사가 그렇듯 창원도 현재의 모습이 갖춰지기까지 순조롭지만은 않았다. 창원단지는 새로운 도시계획에 따라서 산업단지와 배후도시를 한꺼번에 개발하는 방식이었다. 창원단지는 생산액 20억달러의 종합기계공업기지 건설과 계획인구 20만 규모의 산업도시로 설계됐으며, 이를 위해서는 막대한 자금이 필요했고, 우리 기업들의 중화학공업 투자를 유도해야 했다. 1975년 차관 도입을 위해 방문한 세계은행의 간부는 10여개 기업만 공장을 짓는 것을 보고 창원단지 개발의 성공 가능성에 반신반의했으나, 1976년 세 번째 방문에서는 ‘창원의 일이라면 무엇이든지 돕겠다’며 창원의 변화에 찬사를 보냈다고 한다. 그 후로 1979년 제2차 석유파동, 1980년대 후반 노동운동 등으로 창원산단은 큰 홍역을 치렀다. 그러나 우리는 매 순간 열정적이었고 새로운 도전에 주저하지 않았다.

    1974년 1호 기업인 부산포금공업(현 PK밸브)에서 출발한 창원단지는 현재 2500여개 기업에 11만명이 넘는 우리의 이웃들이 근무하고 있다. 창원산단은 경상남도 제조업 총생산의 약 56%, 수출의 38% 정도를 차지하고 있으며, 30개가 넘는 세계일류상품이 창원단지에서 생산되고 있다. 그러나 최근 창원단지는 저성장의 대내외 경제환경과 기계산업 성장세 둔화로 인해 또 다른 시련을 겪고 있다. 일부에선 이런 변화의 흐름에 뒤처진다면 40년 넘게 지속된 기계산업이 좌초될 수도 있다는 위기의 목소리도 들린다.

    응답하라 시리즈의 성공을 보면서 이런 생각을 한다. 응답하라 시리즈의 제작자와 작가들은 원래 예능에서 잔뼈가 굵은 분들로 그 분야에서 큰 성공을 거뒀다. 그러나 그들은 급변하는 방송환경 속에서 드라마라는 새로운 변화를 선택했고, 그 변화 속에서도 본인들이 잘할 수 있는 예능을 버리는 대신에 예능 요소들을 통해 드라마에 재미를 불어넣었다. 창원단지도 마찬가지다. 창원단지가 자랑하는 기계산업 기반 위에서 새로운 도전과 혁신을 시도해야지만 지금 우리가 과거 40년의 창원을 추억하듯, 40년 뒤에도 지금의 창원을 추억할 수 있을 것이다. 지금이야말로 1974년 그때 우리의 도전과 열정에 응답해야 할 때가 아닌가 한다.

    이장훈 (한국산업단지공단 경남지역본부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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