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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년 04월 25일 (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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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가칼럼] 내가 만난 카레이스키- 이석례(수필가)

  • 기사입력 : 2016-04-01 07: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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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안녕하세요? 한국 사람이시죠?”

    반가운 내 인사에 멋쩍게 웃을 뿐 대답이 없다. 상대는 한국어를 모르는 카레이스키다.

    나는 2년 넘게 우즈베키스탄에서 코이카 봉사활동으로 사마르칸트 국립외대에서 한국어를 가르치고 작년 5월에 돌아왔다. 그때 우즈벡에서 고려인(카레이스키)들을 많이 만났다. 학생들 중에도 여러 명이 있었다. 외모는 물론 이름을 보면 고려인임을 바로 알 수 있다. 김 바짐, 신 따냐, 이 세르게이 등 우리와 같은 성이다.

    1937년 구소련의 강제이주정책에 의해 연해주 근방에 살던 한인들은 가축을 실어 나르는 열차에 태워져 지금의 우즈베키스탄이나 카자흐스탄 지역으로 이주하게 됐다. 6000㎞가 넘는 거리를 이동하는 동안 노약자와 어린이 등 60% 정도가 죽었다고 하니 그 처참함을 가히 상상하기 힘들다. 현재 우즈벡에는 약 15만명의 카레이스키가 살고 있다.

    타슈켄트 외곽지역에 집단 농장 지도자였던 김병화(1905~1974) 박물관이 있다. 강제이주로 우즈벡에 온 고려인들이 사막의 나라에서 황무지를 개간해 집단 농장을 만들어 살아남은 이야기를, 자료를 통해 볼 수 있고 관리인에게 들을 수 있다.

    ‘고기는 머리부터 썩는다. 도둑질을 하면 그 도둑질을 생각해내는 머리가 썩는다. 조직에서도 머리(지도부)가 썩지 않도록 신경을 써야 한다.’ 이 말을 강조하며 김병화 지도자는 고려인들을 뭉치게 해 이국의 척박한 땅에서 살아남게 했다.

    타슈켄트 꿀륙 바자르(꿀륙 시장)에 가면 현지에 토착화된 다양한 한국음식을 살 수 있다. 고려인들이 만들어 파는 김치는 물론 순대, 나물 무침, 절인 생선 등. 이 음식들은 고려인뿐만 아니라 다른 민족들도 많이 사먹는다. 사마르칸트에 있는 작은 시장에도 고려인 아주머니들이 집에서 만들어 가지고 나와 파는 한국 반찬이 있다. 가끔 이것저것 사다 먹으면서 맛보다는 음식에 배인 카레이스키들의 마음을 느껴보려 애썼다.

    세대가 내려갈수록 한국어는 잊어버리지만 생활 풍습이나 문화는 맥을 이어가고 있다. 어느 날 고려인 제자 결혼식에 초대받아 갔다. 오래된 한복을 입고 나온 할머니들도 보이고 잔칫상에는 떡이 있었다. 가슴이 잠시 뭉클했다. 한국에서 왔다는 것만으로 아주 반가워하며 극진하게 대접해줬다. 러시아어를 사용하며 소수민족으로 이국에 뿌리를 내리고 살아가는 카레이스키지만 한국은 언제나 그립고 가고 싶은 고향 같은 곳이라고 한다.

    무슬림의 새해맞이 명절인 나브루즈 날 국가적인 큰 행사에 다양한 민족들이 고유의상을 입고 나온다. 그때 다른 민족들과 어깨를 나란히 하며 한복을 입고 나와 춤을 추는 모습을 봤을 때 같은 민족으로서 자랑스럽고 자부심을 느끼기도 했다. 지금 우즈베키스탄에서는 러시아어 사용을 자제하고 우즈벡어 사용을 법으로 권장하기 때문에 러시아어를 쓰는 소수민족의 입지가 좁아들고 있다. 그러다 보니 중심에서 밀려 자꾸 외곽으로 나가게 되고 러시아나 다른 나라로 이주하기도 한다. 고려인들도 벌써 3, 4세대로 내려오면서 혈통이나 언어, 문화 등이 많이 희석됐다. 나는 고려인 학생들에게 남다른 애정을 지니고 한국어 한마디라도 더 가르쳐 주려 애썼고 우즈벡어를 배우라고 종용했다. 며칠 전 나브루즈였다고 우즈벡에서 제자들로부터 SNS로 사진과 인사말이 날아왔다. 한국을 무척 좋아하는 많은 우즈벡 사람들을 보면서 그 바탕에는 부지런하고 강인한 민족성을 지닌 카레이스키들이 있었기 때문이라고 생각했다.

    이석례 (수필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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