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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년 04월 25일 (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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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가칼럼] 나는 늘 떠나고 있다- 박기원(시인)

  • 기사입력 : 2016-04-22 07: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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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으레 계절이 바뀔 때쯤이나 계절을 못 견뎌할 때쯤이면 마치 역마살이라도 씐 양 산으로 들로 바다로 떠나고 싶어 하는 사람이 한둘이 아니겠지만, 나는 겨우내 나태해진 영혼과 게으른 육신을 추슬러 언젠가 한 번은 꼭 경험해보고 싶었던 지인의 노동현장을 향해 떠났다.

    고상하게 불리던 호칭과 계급장을 누구나 할 것 없이 내려놓고 거칠고 투박한 순수만이 머무는 곳인 줄도 모른 채 말이다.

    나뭇가지처럼 손끝의 물집이 꽃망울처럼 봉긋해지고 굳은살 파낸 곳이 선홍빛 꽃물 들 때쯤, 눈부셔서 쳐다볼 수 없는 용접불꽃처럼 벚꽃이 일제히 피어버렸음을 알게 된 것은 나와 다른 색의 살갗을 가진 사람이 일이 서툰 나를 보고 유독 피식거린다는 것을 알고 나서였다.

    카자흐스탄에서 온 27세 ‘딜무라드’, 외국인에 대한 호기심으로 내가 먼저 말을 걸어보니 제법 한국말을 할 줄 안다. 21세에 결혼해서 네 살짜리 딸까지 둔 앳된 어른이란다. 그 먼 나라에서 여기까지 떠나온 의지에 숙연해하기 무섭게 그의 가족에 대한 애틋한 책임감이 나를 형편없는 가장으로 만들고 있었다. 한국에 온 지 3년째, 1년만 더 벌어서 돌아가고 싶단다. 딸 사진 꺼내놓고 ‘여기가 아파요’라며 자기 가슴을 가리킬 땐 하마터면 내가 내 가슴을 칠 뻔했다.

    져다 날라야 하는 자재의 개수를 세는 일과 시간을 재는 일이야말로 정신이 육신에게 패배하는 지름길임도 알게 되면서, 허공을 날던 비닐봉투가 새처럼 나뭇가지 끝에 앉아서 팔락팔락 울어대던 날에도, 손가락들이 몸살 앓는 소리에 쉬 잠들지 못하는 날에도, 안개바다에 빠진 아침을 구하기 위해 삽 낯이 노래진 날에도, 장갑을 헐겁게 끼고 나서면 허술하게 떠나보낸 사람들이 생각나는 날에도, 먼동 틀 때 나온 반달을 새참으로 똑같이 나눠 먹던 날에도 생각의 생각을 지우기에 몰두했다. 육신을 상대하지 않으면 정신이 이긴다는 것을 터득한 것만으로도 이번 떠남의 결실이라면 결실일 것이었다.

    신실한 이슬람교도인 ‘딜무라이’가 그날 우리와 점심을 같이 먹지 않고 올린 기도 덕분이었는지 모처럼 오후엔 쉰다는 소식이 들리자마자 상여꾼 같은 바람이 벚꽃을 태우고 떠날 채비를 서두르고 있었다.

    떠나려할 때 지켜보지 않는 것이 남은 자의 도리기에 나는 더러운 모자 밑에서 눈을 감고 있었다.

    언제부턴가 내가 살아본 세상에서 가장 익숙하면서도 가장 낯선 말 중에 하나가 ‘떠남’이라는 말이었는데, 여전히 나는 가장 지켜내기 어려운 그 말의 속성처럼 떠날 이유를 여전히 찾고 있는지도 모를 일이었다.

    돌아갈 곳이 있어야 떠날 곳도 생기는 법. 마침내 나는 늘 떠나도 언제나 떠나지 못하는 집으로 두어 달 만에 돌아왔다. 떠날 줄 몰라서 남은 사람처럼 문 앞에 서 있던 아내의 눈에서 꽃이 떨어졌다. 아내에게 주려고 뒤춤에 감췄던 꽃을 내려놓고 떨어지는 그 꽃을 받아 안았다.

    딜무라드, 자네도 하루속히 자네 나라로 떠나길 바라네. 무사히.

    박기원 (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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