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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31) 덕기천성(德器天成) - 도덕과 도량이 천부적으로 이루어졌다

허권수의 한자로 보는 세상

  • 기사입력 : 2016-05-10 07: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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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퇴계(退溪) 이황(李滉, 1501~1570) 선생은 우리나라를 대표하는 최고의 학자이다. 학문만 대단한 것이 아니고 인품도 대단했다.

    예안향교에서 공부했다. 선생은 ‘운부군옥(韻府群玉)’이라는 귀한 책 한 질(帙 : 여러 권으로 된 한 세트)을 갖고 있었다. 이 책은 송나라 음시부(陰時夫)란 사람이 편찬한 일종의 백과전서였다. 모두 20권 10책으로 돼 있는데, 우리나라에서도 조선 초기부터 여러 번 간행해 낸 적이 있었다.

    같이 공부하는 유생 가운데 다른 사람도 한 질을 갖고 있었는데, 한 권이 빠져 있었다. 여러 권으로 된 책인데, 한 권이 없으면 무척 아쉬운 법이다. 퇴계 선생이 자리를 비운 사이 책을 슬쩍 훔쳐 자기 책을 채워놓았다. 선생은 알면서도 모른 체했다.

    선생이 어느 날 종이를 마름해 공책을 만들고 있었다. 같은 방을 쓰던 유생이 “공책을 만들어 무엇 하는 데 쓸 것이냐?”고 물었다. 선생은 “내가 갖고 있는 운부군옥이 본래 전부 10권인데, 한 권이 없어 향교에 소장돼 있는 것을 빌려 베껴서 채우려고 만든 것이네”라고 대답했다. 그 유생이 “내가 늘 보아 왔는데, 자네 책은 한 권도 빠지지 않았는데?”라고 의아해했다. 선생이 웃으면서 “내가 어찌 내 책을 모르겠나? 자네가 잘못 봐서 그렇지, 내 책은 원래 한 권이 빠져 있었다네”라고 대답했다.

    만약 퇴계가 책을 잃어버렸다고 향교 관리자에게 신고했다면 퇴계는 책은 찾았겠지만 그 유생은 모든 사람들 앞에서 절도범으로 낙인찍혀 평생을 망치고 말았을 것이다. 아마 퇴계의 이런 처신을 보고 그 사람도 감복(感服)해 다시는 남의 물건을 훔치지 않았을 것이다. 이런 것이 말 없는 가운데 행동으로 보여준 교화(敎化)였다.

    논어(論語)에 “그 자신이 바르면 명령하지 않아도 실행되고, 그 자신이 바르지 못하면 비록 명령해도 따르지 않는다.[其身正,不令而行. 其身不正, 雖令不從.]”는 구절이 있다. 부모나 윗사람이 몸으로 바른 행동을 하면 자식이나 아랫 사람이 보고 따르지만, 부모나 윗사람이 바르지 못하면서 명령하면 명령해도 따르지 않는 법이다. 그러니 법에 의해서 처벌하는 것만이 능사(能事)가 아니고, 행동으로써 감화시키는 것이 중요하다.

    일제의 식민 교육으로 인해 우리 스스로 우리 것을 낮춰보는 의식이 우리나라 지식인들의 머릿속에 있다. 우리 민족은 우리 자체의 성인(聖人)을 갖지 못했다. 하지만 우리나라 역대 인물 가운데 퇴계선생 같은 분은 충분히 성인의 반열에 든다고 생각한다. 우리가 우리 것을 높일 때 외국인도 우리 것을 높일 줄 아는 것이다.

    *德: 큰 덕. *器: 그릇 기.

    *天: 하늘 천. *成: 이룰 성.

    경상대 한문학과 교수

    ※소통마당에 실린 외부 필진의 글은 본지의 편집방향과 일치하지 않을 수도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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