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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남시론] 지속성과 자기 희생 - 박한규(대한법률구조공단 홍보실장)

  • 기사입력 : 2016-05-11 07: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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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지난 4월 13일까지 한동안 상당히 소란스러운 시간을 보냈다. 많은 사람들이 내뱉는 말의 성찬 속에 혹시 저 약속들이 다 지켜진다면 우리나라가 천국이 되지나 않을까 하는 바보 같은 걱정을 하기도 했다.

    사실 약속이라고 하는 것은 불가항력의 이유로 도저히 지킬 수 없는 경우도 있고 때로는 하늘에서 떨어진 감처럼 자연스럽게 이뤄지는 경우도 있다. 그러니 결과를 놓고 판단하기보다 이것을 지키기 위해 얼마나 애를 썼는지, 즉 진정성을 기준으로 판단하는 것이 옳지 않을까?

    Ⅰ- 지난 2004년 한여름의 일이다. 나는 지리산 종주가 처음이었고 친구는 지리산이 처음이었다. 호기롭게 둘은 산청군 중산리에서 시작해 구례군 화엄사까지 2박3일 동안 지리산을 걸었다. 첫날 밤을 묵은 세석산장에서 일이다. 그날은 지금은 없어진 뱀사골산장에서 묵을 계획이라 다소 여유가 있어 한가로운 아침을 보내고 있었다. 그런데 50대 중반으로 보이는 아주머니께서 배낭에서 하얀 천을 끄집어내 산장의 테이블을 덮고 계셨다. 이 장면은 아주 의아했다. 결벽증 환자인가? 이어 아주머니는 와인과 유리 와인 잔을 끄집어내 아주 근사한 상을 차렸다. 조심스레 물으니 같이 온 남편 생일이라고 하더라. 인생을 참 잘사는 분들이다 싶어 숙연해지기까지 했다.

    Ⅱ- 내용과 형식 그리고 운영까지 모든 면에서 파격적인 시도로 우리나라 잡지사에 지금까지 깨어지지 않는 수많은 기록을 남긴 책 ‘뿌리 깊은 나무’. 그 책은 5공 신군부에 의해 폐간됐고 ‘샘이 깊은 물’로 재탄생했다가 지금은 역사에 기록으로만 남아 있다. 아직 이런 책은 나오지 않았다. 한창기가 만들었던 이 ‘뿌리깊은 나무’에서 일했던 시인 송현은 1년에 4일, 꼬박 24시간을 굶는다고 했다. 마치 라마단 기간의 무슬림처럼. 인도 철학자 라즈니쉬, 씨알의 함석헌, 한글기계화의 선구자이자 우리나라 최초의 안과 전문의 공병우 그리고 한창기의 기일(忌日)! 하루 종일 물 한 모금 마시지 않고 다른 번잡스러운 일도 하지 않으면서 그들의 책을 읽고, 유물도 만져 가며 그들을 생각하면서 아무도 모르는 상주가 돼 하루를 보낸다고 했다.

    Ⅲ- 부모는 자식에게 평생 교훈이 될 만한 무엇을 어떻게 가르칠 수 있을까? 어느 지인은 자식이 태어나 백일이 되는 날 저금통을 하나 마련해 그날부터 동전이 생기면 모두 이 저금통에 넣기 시작했다. 저금통이 가득 차면 자식 이름의 통장에 입금했고 성년이 된 그에게 18년간 한 푼 두 푼 모은 통장을 건네면서 가급적 인생의 비상식량이 될 여행비용으로 썼으면 좋겠다고 했단다. 지금 그는 손자(녀)의 백일이 되는 날 그 손자(녀)의 아비에게 그 저금통을 건네줄 날을 손꼽아 기다리고 있다.

    진정성을 검증하는 데는 나름 공통 요소가 있다. 지속성과 자기희생이다. 일회성 행사에서 진정성 유무를 판단하기는 쉽지 않다. 일정 기간 지속되거나 반복돼야만 확인 가능하고 또 아주 긴 기간 지속된다면 그것만으로도 진정성을 인정할 수 있다. 특별한 희생이 없는 단순한 말과 행동에서도 진정성을 발견하기는 어렵다. 자신에게 소중한 것들을 포기하거나 바쳐야만 한다. 비록 타인에게는 소중할지언정 본인에게는 하찮은 것들을 건네는 정도는 베풂이나 사랑이 아닌 단순한 동냥에 불과하다.

    말의 성찬이 세상을 휩쓸고 지나갔다. 진정성이 없음을 미리 눈치채고 이미 판단한 경우도 있고 진정성이 있어 보여 믿고 기다리는 경우도 있다. 말을 자주 바꾸는 사람은 깊이 고민하지 않았기 때문인 경우가 많다. 지속성이 있는지 그리고 어떤 희생을 감수하는지 두 눈을 크게 뜨고 잘 지켜볼 일이다.

    곧 또 한 번의 기회가 온다. 세상 모든 일과 사람에 대해 늘 진지할 수는 없지만 진정성 있는 행동과 말들이 그리운 시절이다.

    박한규 (대한법률구조공단 홍보실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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