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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년 04월 26일 (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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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낙관하지 않는 희망 - 값지고 현실적인 희망의 조건

  • 기사입력 : 2016-05-27 07: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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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우리는 흔히 낙관주의적인 관점에서 희망을 이야기한다. ‘지금 비록 힘들고 어렵지만 앞으로는 잘될 거야’라는 희망을 가슴에 안고 산다. 또는 내게도 기적이 올 것이라고 희망을 건다. 로또가 그런 기적의 하나다. 그럼 이것이 과연 희망일까?

    영국의 대표적인 마르크스주의 문학비평가로, 맨체스터대학교 영문학과 교수인 저자는 이런 것을 낙관주의의 허울에 쌓인 희망이라고 이야기한다. 이런 것은 결코 희망이 아니다.

    낙관주의는 시야에 들어오는 모든 것을 장밋빛으로 착색해버리는 장미색 안경을 끼고 세상을 바라보는 사람의 관점이다. 낙관주의자는 모든 중대사를 자신에게 유리한 방향으로 예단하고 결정해 자신의 천성에 부합하도록 진실마저 왜곡해 버린다고 저자는 주장한다.

    저자는 유리잔에 반쯤 담긴 물을 보면서, ‘저 유리잔은 이미 절반이나 비워졌을 뿐더러 저것에 담긴 액체도 꽤나 맛없고 어쩌면 치명적일 독물이 거의 확실하다’라고 생각할 정도로 비관적인 성정을 가지고 있다고 실토한다. 그러면서도 ‘이런 나의 비관적인 성정을 무릅쓰고라도 희망에 관한 글을 쓰리라고 작심했다’고 한다. ‘사무치는 미래 상실감’을 직면해야 하는 시대에도 희망의 개념은 기묘하리만치 소홀히 다뤄져왔기 때문이다.

    희망을 포기하는 방법은 다양했다. 그중의 하나는 낙관주의라는 허울을 씌워 희망을 이야기하는 것이다. 낙관주의에서 이야기하는 희망은 희망이 아니다. 그것은 인간을 괴롭히는 절망의 다른 형태에 불과한 것이다. 왜냐하면 낙관주의에서 이야기하는 희망은 실현될 가능성이 전혀 없는 희망이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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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저자는 ‘낙관주의자는 절망할 수 없지만 진정한 희망을 알지도 못한다. 왜냐면 그는 진정한 희망을 본질적인 것으로 만드는 상황들을 부인하기 때문이다’고 말한다.

    그럼 진정한 희망은 무엇인가. 사도 바울에게 희망은 메시아의 출현을 끈질기고 기쁘게 확신하면서 기다리는 과정을 의미한다. 제인 오스틴이 소설 ‘설득’에서, 희망을 ‘미래를 믿는 명랑한 확신’이라 지칭하며 그런 희망을 재현했다.

    어느 해설자는 토마스 아퀴나스의 관점에서 희망은 경솔한 낙관주의와 동떨어진 ‘확고부동한 신념과 설레는 확신’을 수반하는 것이라고 설명한다. 그리고 희망이 ‘기원하는 성질’뿐만 아니라 ‘실행하는 성질’도 겸비한다고 생각한다.

    희망은 단순히 목적론적인 것이 아니다. 비극과 마찬가지로 희망은 ‘인간이 짊어져야 할 운명’의 문제일 뿐 아니라 ‘인간이 운명과 맺어야 할 관계’의 문제이기도 하다.

    결국 이글턴이 감지하는 희망은 경박한 낙관주의에 오염된 희망을 정련하고 제련해, 그동안 저평가돼 온 희망의 가치를 상승시키는 것이다. 그렇게 했을 때에만 저자가 이야기하는 ‘진정한 희망’의 여건을 조성하고, 에른스트 블로흐의 허망하고 낙관적인 희망에 대항하는 ‘값지고 현실적인 희망’의 조건을 구성할 것이다. 그렇게 생성되는 희망은 욕망과 비극과 절망을 엄밀하게 직시하면서 낙관하지도 절망하지도 않는 희망이 될 것이다.

    이글턴은 말한다. ‘헛된 희망을 품는 사람이 반드시 어리석지는 않을지라도 불합리한 희망을 품는 사람은 어리석다’고. 테리 이글턴 저, 김성균 역, 우물이있는집 간, 1만5000원  서영훈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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