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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길예담] (28) 조경옥 서양화가와 걷는 김해 화포천

생동과 소멸의 무한반복… 화가가 들려주는 길 위의 사계

  • 기사입력 : 2016-06-16 22: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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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조경옥 화가가 김해시 한림면 화포천 습지 생태공원에서 김세정 기자와 왕버들이 군락을 이룬 탐방로를 따라 걷고 있다./김승권 기자/

    사방은 온통 초록빛이다. 직선으로 길게 뻗은 산책로를 따라 옆으로 몸을 늘어뜨린 풀과 이파리 무성한 나무가 이어진다. 산책로 뒤로 보이는 하천은 평온하다. 바람이 불자 흙빛이 섞인, 약간은 탁한 푸른색 물결이 살짝 일렁인다. 인적도 드물다. 평일 낮 시간이라 그랬을까. 산책로를 왕복할 동안 마주친 사람은 딱 1명. 이따금씩 멀리서 경운기 소리가 들려온다.

    처음 가본 김해 화포천은 조경옥 서양화가의 그림과 꼭 닮은 모습이었다. 푸르고 고요했다. 데크 산책로와 생태학습관 건물을 제외하면 사람의 손길은 크게 느껴지지 않는다. 무성한 풀과 나무, 잔잔한 하천은 태초의 원시적인 자연을 떠올리게 한다.

    조경옥은 이런 자연을 화폭에 담는 작가다. 60대 중반인 그는 20여년간 김해에 머물며 낙동강변, 녹산, 칠산, 화포천 등 주변 풍경을 그려 왔다. 그는 어떻게 자연에 빠지게 됐을까. 조경옥 화가와 함께 작품 속 화포천을 걸으며 그의 삶에 대한 이야기를 들어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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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조경옥 화가가 김해시 한림면 화포천 습지 생태공원에서 왕버들이 군락이 이룬 탐방로를 따라 걷고 있다./김승권 기자/

    “부침이 심했지. 남이 하던 대로 쫓아다녔어.” 그는 젊은 시절을 그렇게 회고했다. 부산에서 학원을 하며 미대 입시생을 가르쳤던 20대 중반, 작품은 실험의 연속이었다. 물감을 손으로 긁고 나이프로만 드로잉을 하고 종이를 찢었다. 흙의 색을 세밀하게 표현하기 위해 산, 논, 밭의 흙을 가져와 캔버스에 문질렀고 불에 타고 남은 흙의 색을 보고 싶어 잔디를 태우기도 했다. “할 수 있는 건 다 해본 것 같아. 진짜 별 짓 다해 봤지” 고백하는 그의 목소리가 덤덤하다. 실험은 30대에도 계속됐다. 끊임없이 그렸고 공부했다. 300~400호짜리 작품을 하루에 2점씩 완성할 때도 있었고 닥치는 대로 책을 읽으며 온갖 미술사조도 섭렵했다. “미술을 하는 사람이 많잖아. 남들보다 튀고 싶었어. 주목받기 위해 발버둥쳤지.”

    그러던 어느 봄, 그는 부산에서의 생활을 모두 정리하고 김해로 왔다. 1988년 4월이었다. ‘진짜 내 작품’을 그리고 싶어서였다. 남들이 하는 대로 휩쓸려 다니지 않고 ‘나만의 것’을 찾기 위한 결단이었다.

    첫 터전은 주촌면. 비닐하우스를 개조해 작업실을 꾸렸다. 왜 주촌으로 갔냐고 물으니 싱거운 대답이 돌아온다. “넓은 터가 필요했는데 거기가 땅값이 싸더라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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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조경옥 作 ‘주변 이야기’


    우연히 들어앉은 그 주촌이 자연에 정착하는 계기가 됐다. 당시 주촌은 날 것의 자연 그 자체였다. 밖에는 온통 들판이었고 정비되지 않은, 원형 그대로의 하천이 흘렀다. 그는 자연을 관찰하면서 생명력에 매료됐다. 자연의 소리나 향기, 미세한 움직임까지, 살아있는 그대로를 화폭에 담고 싶었다고 했다. 아카시아 나무의 이파리를 일일이 세고, 잎사귀의 맥을 들여다보면서 그림을 그렸다. “러시아를 보면, 도스토옙스키 같은 작가들이 꽃이 피는 과정을 2~3페이지에 걸쳐 설명하거든. 땅에서 발아하는 것부터 자라는 것까지 아주 자세하게. 나도 그렇게 그리고 싶었던 거야.” 그는 1996년 첫 개인전에서 완판을 기록하며 자신의 선택이 옳았음을 확신한다.

    그는 화포천을 여러 번 찾았다. 철마다 다른 얼굴을 하기 때문이란다. 산책로 끝자락, 풀이 무성한 하천을 지긋이 바라보며 그가 화포천의 사계를 들려 준다. 봄에는 풀이 낮다. 얼었던 땅에서 솟아난 풀들이 조금씩 고개를 밀어올린다. 여름은 초록의 향연이다. 딱 지금 모습이다. 보는 것만으로도 눈과 마음이 맑아진다. 가을에는 하천 사이사이로 갈대가 얼굴을 내민다. 색은 짙은 초록에서 엷은 황톳빛이 된다. 겨울은 모든 것이 뼈대만 남는다. 갈대도 대만 남고 나무도 가지만 남아 앙상하다. 봄, 여름, 가을과 달리 겨울엔 특별한 감흥이 없을 것 같다고 생각하던 찰나, 작가가 덧붙인다. “그 앙상함이 또 좋거든. 바람이 불면 대만 남아서 사각거리는 소리가 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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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조경옥 화가가 김해시 한림면 화포천 습지 생태공원에서 왕버들 군락등 화포천 습지를 감상하고 있다./김승권 기자/

    그의 말을 듣고 보니 화포천이 새롭다. 늘 고요하다고만 생각했던 화포천은 사실 부단히도 살아 움직인다. 풀, 꽃, 나무는 사시사철 한순간도 쉬지 않고 생동과 소멸을 반복한다. 따뜻해지면 싹을 틔우고 그 뒤엔 꽃을 피우고 서늘해지면 모든 것을 떨군다.

    발걸음을 돌려 이번엔 작업에 대한 이야기를 풀어 놓는다. 그는 보통의 캔버스를 사용하지 않는다. 표면이 올록볼록한 캔버스와는 달리 그의 작품 바탕은 유리처럼 매끈한데, 이는 자신만의 방식으로 직접 만든 것이다. 패널 위에 한지를 2겹으로 붙이고 그 위에 흰색의 페인트로 여러 번 밑칠을 한다. 밑칠이 다 마르기까지는 꼬박 이틀이 걸린다. 색도 기존의 것을 사용하지 않는다. 그의 그림은 대부분 녹색으로 채워져 있지만 자세히 보면 같은 색은 없다. 갓 피어난 새싹의 연두색, 여름철 나무의 짙은 녹색, 조금 시들한 풀의 색까지, 자연의 색이 모두 다르고 철마다 변하는 탓에 그 미세함을 화폭에 옮기기 위해 색을 직접 만들어 쓴다. 시중에 수십 가지 색의 물감이 있지만 쓰는 것은 12색이 전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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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그림은 하루도 빠짐없이 그린다. 다른 일정이 있어도 꼭 1~2시간은 붓을 든다. 주위에서는 쫓기듯 작업한다고도 하지만 그의 신념은 확고하다. 그것이 ‘그림으로 먹고사는 사람이 해야 할 일’이라는 것이다. “젊은 후배들 좋은 작품 보면서 계속 배우려고 해. 끊임없이 고민하고 그려서 최상의 작품만 전시하는 거야.” 그림을 위한 체력 관리도 소홀히 하지 않는다. 매일 아침 산을 오르고 저녁엔 근처 공원을 10바퀴씩 돈다. 그의 그림은 그렇게 완성된다. 자연을 담은 그림은 한없이 평온하지만 완성되는 과정은 한없이 치열하다.


    이야기를 듣다 보니 그의 삶과 자연이 자연스레 포개진다. 그가 자연을 그리게 된 것은 아마 닮았기 때문일 것이다. 끊임없이 생동하는 자연과 하루도 붓놀림을 쉬지 않는 그는 분명 닮았다. 평온함 속에 치열함을 품은 것도. 닮아서 좋아했는지, 좋아해서 닮은 것인지는 모르겠다. 어느 쪽이든 상관없다. 분명한 것은 그도 자연도 최선을 다해 삶을 이어간다는 점이다.

    어느 순간 삶이 무기력하다고 느껴질 때는 화포천을 걷고 그의 그림을 들여다볼 것을 권한다. 실제 자연도, 그림 속 자연도 싱싱한 생명력을 뿜고 있을 테니까.

    김세정 기자 sjkim@knnews.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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