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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년 04월 20일 (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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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가칼럼] 여자 혹은 여성의 변화- 이주언(시인)

  • 기사입력 : 2016-07-15 07: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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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내 휴대폰을 열어 ‘010’을 누르면 몇 개월 전에 돌아가신 친정 엄마의 얼굴이 나온다. 엄마의 전화번호를 삭제하지 않고 ‘010’으로 수정해 놓았기 때문이다. 거기다 사진까지 저장해놓으니 엄마가 보고 싶을 때 수시로 ‘010’을 눌러서 호출하기가 쉽다. 그 얼굴을 볼 때마다 엄마를 한번 안아보고 싶다는 간절함이 생긴다. 그러나 화면 속 얼굴을 손가락으로 문질러보는 일 말고는 별 도리가 없다. 통화료를 아까워하시던 엄마와의 통화는 생전에도 간단히 끝났는데, 지금도 휴대폰 속 엄마는 신호음이 끝나는 순간까지만 잠깐 얼굴을 보여주고 통화를 끝낸다. 우리네 어머니들은 아끼고 또 아끼는 생활습관으로 자식들을 길러냈다. 친정 엄마를 생각하면 생전에 지녔던 가난과 마음고생, 초라함이 떠올라 가슴 아프다. 고달픈 여자의 일생을 살다 가셨다.

    피터 한트케의 소설 ‘소망 없는 불행’을 보면 우리네 엄마들과 비슷한 어머니상(像)이 나온다. 무릎 툭 튀어나온 낡은 속바지를 보여주듯 어머니 인생의 누추한 실상을 보여주는 작품이다. 우리와 문화적 차이가 있긴 하지만 여전히 초라한 것이 여자의 삶이었다는 생각이 든다. 주인공의 어머니는 구차한 생활을 몸에 두르고 자신을 돌아볼 겨를도 없이 살았다. 그러다 어느 날 반짝 자의식이 살아난다. 책도 읽고, 시장을 오가며 에스프레소 커피도 마시고, 매니큐어를 바르고, 정치에 관심을 가지기도 한다. 그러한 세월도 잠시, 원인을 알 수 없는 병마가 덮쳐서 시달리게 되고 병의 호전과 재발이 이어지다 결국 자살을 선택한다. 작품 전체에 어머니의 삶을 바라보는 작가의 안타까운 시선이 관통하고 있다. 세상의 어머니들은 동서를 막론하고 비슷하게 살아갔던 모양이다.

    이와 달리 요즘 여성들의 삶은 많이 달라졌다. 이제는 여성의 삶이 초라하다는 말이 어울리지 않는다. 당당한 여성의 삶이 가장 잘 드러나는 것이 학교성적이다. 남녀공학에 가면 남학생이 내신에서 불리할 만큼 여학생들의 성적이 우수하다. 우리의 학창시절만 하더라도 여학생들의 평균성적은 남학생들의 평균성적보다 현저히 떨어졌다. 어린 생각에 남자들이 선천적으로 능력을 타고나는 것이라고 여긴 적도 있다. 그때는 부모가 아들에게 먼저 투자를 했으므로 딸들은 희생양이 되기 일쑤였다. 하지만 지금은 기회가 균등하게 주어진다. 학교뿐만 아니라 모든 분야에서 여성들이 우수한 능력을 드러내고 있다. 이런 결과는 사회구조적 변화와 개인의 노력 때문이다. 통계에 의하면, 게임 때문에 남학생들이 공부하는 시간이 여학생들보다 하루 평균 한두 시간 정도 적다고 한다. 남성이든 여성이든 시간과 노력을 투자하는 만큼 성취하는 시대다.

    이러한 여성의 능력 상승에 대해 불만을 가진 남성도 있는 것 같다. 방송에 나온 어느 사회학자가 강남역 살인사건의 원인이 ‘여성혐오’일 것이라고 분석했다. ‘여성혐오’냐 ‘조현병’이냐 살인의 원인을 두고 사회적 이슈가 되었는데 여성혐오라는 쪽의 의견도 무시할 수 없는 모양이다. 씁쓸한 기분이 든다. 그 사회학자의 말에 따르면 생활 여건이 양호할 때는 여성의 지위 상승이 문제가 되지 않는다고 한다. 그러나 지금처럼 청년실업과 경제적 불안이 사회적 배경이 될 때는 여성의 우수성으로 인해 남성들이 상대적으로 피해의식을 느낀다는 것이다. 여성의 능력 상승을 남성과의 밥그릇 싸움으로 인식한 자가 벌인, 묻지마 살인이라는 결론에 이를 수도 있다. 달라진 여성의 환경과 능력으로 인해 남성들이 피해의식을 느끼는 사회가 아니라, 공존하는 기쁨으로 이어지는 넉넉한 사회가 되면 좋겠다.

    이주언 (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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