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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년 03월 29일 (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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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춘추칼럼] 가십의 나라에서- 신형철(문학평론가)

  • 기사입력 : 2016-07-29 07: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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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폭격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닐 듯싶다. 종편 방송도 포털 사이트도 눈만 뜨면 각종 유명인(주로 연예인)들의 사생활 관련 정보들을 쏟아낸다. 국민이 낸 세금을 대신 집행하거나 이를 감시하는 사회적 공인들의 공적 활동에 대한 정보가 아니라, 그저 직업의 특성상 대중에게 얼굴과 이름이 알려져 있을 뿐인 사람들의 사적 삶에 대한 정보다. 미담(美談)도 아니고 대부분 추문(醜聞)인데, 사실로 확인된 것과 단지 추정일 뿐인 것이 마구잡이로 뒤섞여 있다. 보지 않으면 그만이겠으나 쉽지가 않다. 폭격 수준으로 쏟아지니 자꾸 눈에 띄고, 인간 본성의 결함 때문인지 자꾸 유혹에 지고 만다. 덕분에 우리는 시간을 날리고, 관련 업체와 매체는 수익을 거두며, 성찰과 토론이 필요한 공적 사안들은 뒤로 밀린다.

    이와 같은 정보와 그런 정보를 주고받는 행위를 ‘가십(gossip)’이라고 한다. ‘잡담’이라 하면 뜻이 약해지고 ‘폄론(貶論)’이라 하면 어려우니 ‘쑥덕공론’ 정도로 옮기면 무난하겠다. 가십은 정말 인간 본성에 속하는 것일까. 1993년 인류학자 로빈 던바(Robin Dunbar)는 인간의 언어가 발달한 이유는 ‘물리적’ 환경에 대한 정보(예컨대 사냥을 위한 팁)가 아니라 ‘사회적’ 환경에 대한 정보(예컨대 타인에 대한 평가)를 공유하기 위해서라는 주장을 폈다. 집단생활을 하려면 누가 나에게 도움이 되는 사람인지 아닌지를 판단하는 것이 중요한데, 집단의 규모가 커지면 일일이 만나 판단할 수 없으므로 가십을 참조하게 된다는 것이다. 인간의 특정 성향을 생존과 번식을 위한 진화의 산물로 간주하는 ‘진화심리학’의 관점에서 보면 가십은 진화적 이득이 있어 발달돼 온 것이 된다.

    그런데 가십은 왜 타인에 대한 긍정적 정보가 아니라 부정적 정보를 우대하는 것일까. ‘샤덴프로이데(Schadenfreude)’라는 독일어가 있다. ‘남의 불행(Shaden)을 통해 느끼는 나의 행복(Freude)’을 뜻하는 이 말을 한국어로는 한 단어로 번역할 수가 없다. 데이비드 버스의 ‘진화심리학’(1999)에 소개된 한 실험에 따르면 인간은 타인의 사회적 추락에 샤덴프로이데를 느끼는데, 타인의 지위가 높을수록, 그의 성공이 부당하다 여겨질수록, 제 자존감이 낮은 사람일수록 그 기쁨의 강도가 세다고 한다. 그렇다면 가십이 타인의 긍정적 정보가 아니라 부정적 정보에 몰두하는 것은 당연해 보인다. 그 정보가 타인의 추락을 예감하게 하고, 그로 인해 나에게 제공될지 모를 반사이익을 (무)의식적으로 기대하게 하며, 그 기대가 결국 나에게 쾌감을 주기 때문이다.

    이게 다가 아니다. 영국 월간지 ‘사이칼러지즈(Psychologies)’(2011년 12월)의 한 기사는 가십에 따르는 부수적 이익 하나를 이렇게 설명한다. 우리는 타인에 대한 비방이 떳떳하지 못한 일임을 잘 알고 있기 때문에 그 일을 일삼는 사람을 나쁜 사람이라고 판단하는 경향이 있다.

    만약 A가 B에게 제3자인 C에 대한 부정적 정보를 말하면 B가 A를 나쁜 사람이라 판단할 수 있으므로 비방을 먼저 시도하는 일은 꽤 위험한 일이다. 그런데 아이러니하게도 바로 그렇기 때문에 B가 A에게 동조할 가능성은 높아진다. A가 그런 위험을 감수하면서까지 그런 말을 했다는 것은 그만큼 A가 자신을 신뢰하기 때문이라고 B는 판단하게 된다는 것. 이를 통해 A와 B 사이에는 강한 결속 관계가 성립된다. ‘빨리 친해지고 싶은가? 제3자를 함께 헐뜯으라.’

    가십의 사회심리학을 소략하나마 소개한 것은 그것에 탐닉하는 우리를 합리화하기 위해서가 아니며 그렇다고 가십을 멀리하고 공적 의제에 관심을 가져야 한다는 공허한 결론을 부르짖기 위해서도 아니다. 내가 궁금한 것은 왜 가십의 양이 점점 더 늘어나고 있는가 하는 점이다.

    언론매체가 난립해 경쟁이 과열되면서 가십 생산 자체가 늘어났고 통신수단의 발달로 가십 유통도 더 원활해졌다는 것 말고 다른 이유는 없을까. 가십이 타인의 추락을 예감하는 쾌감을 제공하고 그 쾌감을 공유하는 이들을 결속시킨다는 설명이 옳다면, 가십의 폭증은 그만큼 우리 사회가 공정한 경쟁의 장을 제공해 구성원 각자가 크든 작든 저마다의 성취와 보람을 누리도록 하는 데 무능하다는 증거인 것은 아닐까. 그러니까 마르크스 식으로 말해 ‘가십은 인민의 아편’인 것일까.

    신형철 (문학평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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