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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년 03월 28일 (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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심재근의 우리땅 순례 (118) 산청 (7) 생비량면 도전리 마애불상군 ~ 단성면 목면시배유지

세월의 흔적 새겨진 암벽엔 세월의 무게가 담겼네

  • 기사입력 : 2016-09-20 22: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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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햇볕이 따갑고 무덥다고 아무리 아우성을 쳐도 가을은 오는가 보다. 여름을 묵묵히 보낸 들판의 벼는 누렇게 익어 벌써 추수를 끝낸 곳이 보인다. 김현승 시인은 가을의 시에서 “넓이와 높이보다, 내게 깊이를 주소서, 나에 눈물에 해당하는…(중략)”이라 했고, 강은교 시인은 “나뭇가지 사이로, 잎들이 떠나가네, 그림자 하나 눕네(중략)”라고 했다. 가을은 생각하는 계절이고 책을 읽으며 사색을 하며 여행을 하는 계절이다. 무슨 일이든지 지금 바로 계획을 세워 실천하지 않으면 아름다운 가을 떠나가듯 지나간다. 무작정 가벼운 차림으로 집을 떠나서 만나고 보이며 부딪치는 낯선 것은 또 다른 자신이다. 여행은 거창하거나 화려할 필요는 없다. 최소한 가볍게 챙겨 나서면 부족한 것은 길에서 채워진다. 낯선 길에서 채워지는 하찮은 것들은 자신을 행복하게 해주는 아주 소중한 것들이다.

    이섬·이담 임진왜란전공비, 도전리마애불상군

    신안면 갈전리 산청산골박물관에서 원지로 가는 길목에 중촌마을이 있다. 벼들이 무럭무럭 자라는 들판 도로변 거북석등에 비석과 정자가 보여 걸음을 멈췄다. 겨울에도 푸른 절개를 가진다는 소나무를 뜻 하는 한송정 정자에 올라서도 더위는 잠시도 수그러들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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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섬·이담 임진왜란 전공비
    잠시 땀을 식히고 비석을 읽어보니 산청군에서 세운 이담·이섬 임진왜란(1592~1598) 전공비였다. 임진왜란 당시 이순신 장군을 도와 위기에 처한 나라를 구한 전공은 널리 알려야 한다. 그의 고향 중촌마을 뒷산에 이담의 묘소가 있고 그의 행덕을 추모하는 한천재가 함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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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정자 ‘한천재’

    독일 여행길에 프랑크푸르트 골목길을 걷다 낡은 건물 벽 작은 흉상 앞에 사람들이 발걸음을 멈추는 것이 보였다. 잠시 고개를 숙이고 묵념을 하며 꽃을 바치는 모습이 인상적이었다. 2차 대전 당시 독일군이 유대인을 학살하려고 체포하는 것을 보고 생명의 위험을 무릅쓰고 10여명의 유대인을 지하에 숨겨줘 목숨을 구해 줬던 사람이라 했다. 오랜 역사를 가진 우리나라에도 자신을 밝히지 않고 선행을 했던 분들이 있을 것이다. 마을을 이어주는 둘레길 길목에서 세상을 따뜻하게 했던 분들의 흔적을 만나고 싶다. 그러면 사람들의 따뜻한 이야기가 강물처럼 길 따라 흘러 선한 세상이 될 것이라 여겨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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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도전리 마애불상군


    신안면 원지로 가는 길을 버리고 좁은 임도 같은 산길 고개를 넘어 생비량면으로 향했다. 생비량이라는 지명이 특이하다. 지명에 대한 전설은 이렇다. 인근 절에 덕망 있는 ‘비량’이라는 스님이 있었다. 세월이 흘러 스님은 입적을 했고 주민들은 안타깝게 여기고 이를 기려 스님은 떠났지만 영혼은 우리 곁에 살아 있을 것이라 믿고 ‘비량(比良)’스님 이름 앞에 생 (生)자를 붙여 지명을 생비량(生比良)이라 했다 전한다. 생비량면 도전리 마을 입구에 오래된 농협창고가 있었다. 창고 앞은 주차장이다. 예전에는 창고 뒤쪽 과수원이 있는 밭 사이로 길이 있었다. 방문객들이 과수원의 열매에 손을 대는지 경고문이 감나무에 붙어있고 길은 폐쇄됐다. 지난봄 일본 규슈올레를 걸을 때도 과수원이 있는 길가에 한글로 열매를 따지 말라는 안내문이 붙어있었다. 이제 우리도 선진국 가치를 가지는 모범적인 여행 문화가 정착돼야 한다. 도전리 마애불상군으로 가는 길은 소나무 사이로 난 나무계단이 있다. 계단을 따라 잠시 오르면 인근 마을 사람들이 ‘부처덤’이라고 부르는 자연석 암벽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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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부처덤’이라고도 불리는 도전리 마애불상군 암벽. 이 자연암벽에는 29구의 불상이 새겨져 있다.

    그리 넓지 않은 자연암벽에 29구의 불상이 조밀하게 새겨져 있었다. 마을 지명을 따서 도전리 마애불상군이라고 부른다. 불상은 절벽에 4층으로 줄을 지어 새겨졌는데 1층 14구, 2층 9구, 3층 3구, 4층 3구 등으로 배치됐고 크기는 30㎝ 내외이다. 암벽 앞에 좁은 공간이 있기는 하나 안전에 주의해야 한다. 불상의 크기가 크지 않고 희미해서 학생들을 위해 상세하게 쓴다. 불상들을 가만히 보고 있으면 여러 가지 형식이지만 대개 엇비슷하다. 불상은 연꽃이 새겨진 자리 위에 오른발을 왼쪽 허벅다리 위에 놓은 다음 왼발을 오른편 허벅다리 위에 놓고 앉아 있기도 하다. 짧은 머리칼에 큼직한 머리가 솟아 있고, 얼굴은 둥글고 단아한 모습이다. 전체적으로 세월의 흐름을 견디지 못하고 많이 마멸됐다. 몸은 사각형인데 단정하며 양 어깨를 모두 덮은 옷차림이다. 통견이라 한다. 신라말 고려초 특히 고려시대의 불상 특징이 강하게 엿보이고 있다. 불상을 구분하는 손모양의 경우 선정인, 시무외인, 구슬을 든 손 모양으로 다양하게 묘사돼 있었다. 불상군 앞을 흐르는 양천에는 검은 돌들이 예사롭지 않게 일정한 간격으로 호위를 하듯이 무리지어 있었다. 이런 엉뚱한 생각을 해보는 것도 기행에서 만나는 작은 행복이다.


    배산서원, 목면시배유지, 면화시배지

    들판에 가을이 익어가는 한가로운 20번 국도 지리산대로를 따라 신안면 소재지에서 단성교를 따라 남강을 건넜다. 도로명 주소 단성면 목화로 887에 배산서원과 목면시배유지, 면화시배지가 가까운 거리에 있다. 배산서원은 목면시배유지의 명성에 가려 그냥 지나치기 쉽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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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배산서원

    서원은 조선 중기 이후 학문 연구와 선현들의 제사를 지내기 위해 사림에 의해 설립된 사설 교육기관이며 향촌 자치운영기구였다. 우리나라의 서원은 1543년(중종 38) 풍기군수 주세붕이 고려 말 학자 안향을 배향하고 유생을 가르치기 위해 경상도 순흥에 백운동서원을 창건한 것이 처음이다. 배산서원은 문익점의 위패가 있는 신안면 신안리 도천서원에 위패가 있었던 청향당 이원과 죽각 이광우를 위해 세운 서원이다. 사월 마을 입구 낮은 산자락에 있다. 콘크리트 주차장에 차를 세우고 나니 인근에서 농산물 제조업을 하는 주인 내외가 새콤한 오미자 한잔을 건넨다. 시골마을의 인심까지 전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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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목면시배유지 비석


    배산서원에 위패가 있는 이원(1501~1568)은 벼슬이나 과거에 뜻을 두지 않고 학문연구를 한 조선 전기의 학자이다. 그는 조식·이황 선생과 학문의 뜻을 같이했으며, 명종 1년(1546)에는 나라에서 벼슬을 내렸으나 거절하고 학문에만 전념했다. 배산서원은 조선 영조 47년(1771)에 덕연사만 세워 위패를 모셨으나, 흥선대원군의 서원철폐령으로 고종 5년(1868)에 철거됐다. 그 뒤 1919년에 새로 지어 배산서당이라 했다. 배산서원에는 공자의 위패가 있는 문묘, 위패를 봉안한 도동사, 교육을 하는 강당이 있다. 원래 서당은 서원의 부속된 형태로 서민 자녀의 초등교육을 하는 곳이었다. 문묘의 건물은 앞면 3칸·옆면 1칸 반 규모로 공자의 영정이 있다. 도동사는 앞면 3칸·옆면 1칸 반 크기의 건물로 청향당 이원·퇴계 이황·남명·죽각 이광우 등의 위패가 있다. 강당은 앞면 4칸·옆면 2칸 규모로, 지붕은 우아한 팔작지붕이다. 강당에는 중국학자 강유위가 쓴 현판과 백범 김구·성재 이시영·우천 조완구·백암 박은식 선생의 배산서당 낙성축문 현판이 보관돼 있다. 배산서원에는 문묘와 도동사 등 사당이 2개 있는 것이 특이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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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목면시배유지 강당


    배산서원을 나오면 만나는 목면시배유지는 사적 제108호이다. 산청군 단성면 사월리에 위치한 목면시배유지는 고려말 공민왕 때 문익점이 처음으로 면화를 재배한 곳이다. 문익점은 공민왕 12년(1363) 원나라에 가는 사신의 일원으로 갔다가, 귀국하는 길에 붓대에 면화씨를 넣어 가지고 왔다. 문익점은 장인 정천익과 함께 재배를 했는데 처음에는 한 그루만을 겨우 살릴 수 있었다. 그러다가 3년간의 노력 끝에 전국에 목화재배를 퍼지게 했다. 그 이전에는 명주, 모시, 삼베 등으로 의복을 만들어 입었기 때문에 일반사람들은 추위에 떨며 고생을 했다. 그 후 백성들은 무명옷을 입게 됐다. 전시실에는 목면에 대한 내용을 학생들이 쉽게 이해하고 고마움을 알 수 있도록 실을 뽑는 기계는 물론 베를 짜는 베틀이 진열돼 있었다. 주변에 사라져가는 면화를 재배해 봄에는 꽃들을 보고 가을에는 탐스러운 하얀 목화가 옛 추억을 떠올리게 한다. 가을에 목화는 따서 이불솜으로 만들어 판매한다. 산청의 특산물인 밤고구마를 파는 농산물 판매장이 근처에 있어 그냥 지나가지 않는다.

    심재근 (마산대 입학부처장·옛그늘문화유산답사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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