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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을 보며] 금서가 된 ‘맹자’- 서영훈(문화체육부장)

  • 기사입력 : 2016-09-29 07: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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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80년대 초 부림사건을 모티프로 한 영화 ‘변호인’에서 송우석 변호사는 이 사건 공소장에 적시된 이른바 ‘불온서적’들을 열거하며 이렇게 말한다.

    “서울대에서 추천하고 있는 서적들입니다. 대한민국 최고 교육기관이 불온집단이란 말입니까? 그럼 판사님, 검사님도 서울대 나오셨으니 불온집단 출신이시네예.”

    그 불온서적이라는 것들이 E.H.카의 ‘역사란 무엇인가’, 이영희 교수의 ‘전환시대의 논리’와 ‘8억인과의 대화’ 등 이었다. 지금의 시각으로 보면 교양서적 범주에 넣으면 딱 맞을 듯한 내용의 책들이다.

    그러나 당시엔 달랐다. 역사를, 민중을 이야기하는 것 자체가 금기시되던 때였다. 70년대에 출간됐던 ‘전환시대의 논리’나 ‘8억인과의 대화’ 등은 유신체제 하에서 금서목록에도 올랐다.

    금서가 비단 군사정권 시대에만 있었던 건 아니다.

    조선 중·후기에는 조선이 망하고 정씨가 계룡산에 도읍한다는 내용을 담은 ‘정감록’이나 가톨릭 교리서인 ‘천주실의’, 또 구한말에는 동물들을 통해 인간사회의 모순을 풍자한 우화소설 ‘금수회의록’ 등이 그리 됐다.

    권력자들은 기존 질서를 부정하는 출판물을 금서로 지정하는 등 사상을 통제했다. 이는 동서양이 다르지 않았다.

    고대 그리스의 아테네에서는 소피스트였던 프로타고라스가 절대적인 진리는 존재하지 않는다고 주장하는 등 사실상 신에 대한 불경죄를 지었다는 이유로 말년에 아테네에서 추방되고 그의 저서가 불태워졌다.

    로마시대에는 호메로스의 서사시 ‘일리아드’와 ‘오디세이’가 황제 체제에 반대하는 사상을 퍼뜨린다는 이유로 금서가 됐다.

    기원전 중국에서 일어난 분서갱유는 너무나 유명하다. 중국 최초의 통일국가를 세운 진시황은 유학자들의 정치적 비판을 막기 위해 의약 및 농업 등에 관한 것을 제외한 서적을 불태우고 수백 명의 유생들을 생매장했다. 이 나라에서는 사서(四書)의 하나인 ‘맹자’도 한때 금서가 됐다.

    명나라 태조 주원장은 어느날 맹자를 읽다가 갑자기 신하들에게 맹자를 모두 불태워 버리라고 소리쳤다. 주원장은 신하들의 간언으로 분서를 하지는 못했지만, 7편 260장으로 이뤄진 맹자 중 88개 장을 삭제한 ‘맹자절문(孟子節文)’을 만들게 했다. 그가 보기에 불온하다고 여긴 부분을 모조리 없앤 것이다. 글자 수로만 보면 맹자의 거의 절반이 사라졌다. 폭군을 비난하고 왕도를 말하는 대목, 백성이 존귀하다고 말하는 대목 등이 삭제의 대상이었다.

    이 책에서 특히 주원장의 심기를 건드린 부분은 ‘군지시신여토개(君之視臣如土芥) 신시군여구수·臣視君如寇讐)’로 알려져 있다. ‘군주가 신하를 흙이나 지푸라기 즉 하잘것없는 존재라 여기면, 신하는 그를 원수처럼 여긴다’는 뜻이다. 이 말은 ‘군주가 신하를 자신의 수족처럼 소중히 여기면, 신하도 그를 자신의 배와 심장처럼 여긴다’는 말에 이어 나온다. 이 글귀의 행간은 힘 있는 자가 먼저 진심으로 대해 줘야 한다는 것으로 읽힌다. 너무 당연한 말인데도, 군주 즉 황제가 지배하던 시절에는 도저히 용납되지 않는 주장이었다.

    정부나 자치단체, 기업 등 그 단위의 크고 작음을 가릴 것 없이 리더가 가슴에 새겨놓고 매일매일 자신의 행동을 되돌아본다면 ‘원수’로 대접받는 일은 없을 것이다.

    서영훈 (문화체육부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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