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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년 04월 20일 (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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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산칼럼] 슬픔 예찬- 정진혜(서양화가)

  • 기사입력 : 2016-09-29 07: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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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외롭다, 아프다, 그립다 하는 것들은 슬픔의 단상이다. 슬픔이라는 것은 기쁨과 대응하는 정서로 알고 있지만 실상 슬픔과 기쁨은 인간이 기본적으로 체험하는 불가분의 정서다. 쓸쓸함 뒤의 여백은 자신을 투명하게 볼 수 있는 여유로운 시·공간을 만들어주고, 아픔을 겪은 뒤의 삶은 한층 성숙해지며 그리움은 무엇인가를 쉼 없이 사랑하게 하는 힘을 부여한다.

    슬픔이 다그쳤을 때, 가만히 그 슬픔을 받아들여 여과되는 상태를 관조할 줄 아는 이는 슬픔의 힘을, 즉 슬픔의 아름다움을 선사받게 된다. 슬픔으로 인한 눈물이 보석처럼 빛난다는 사실을 체험해보지 못한 사람은 슬픔에 대한 감정과 현상들을 우선 배척하려는 본능이 있다. 그것은 슬픔이 안 좋은 감정, 안 좋은 현상으로 나타나 두려움으로 전해져 오기 때문이다. 그러나 슬픔의 심층으로 들어가서 진정 그것과 정면충돌해 보면 슬픔이 얼마나 따뜻하며 빛나는 힘을 가졌는지를 알게 된다.

    미술을 전공해 대학을 마치고 전업화가로 살겠다는 삶의 방향을 결정함과 동시에 나는 이전에 겪지 못한 그림세계의 깊은 딜레마에 빠지게 되었다. 예술의 본질적 가치관마저도 흔들렸고 모든 것이 나를 방황하게 했던 기억이 있다. 그 방황의 산물인 양 정체성을 잃은 온갖 형태의 그림들만 쌓여 오물처럼 느껴졌던 기억…. 그런 혼돈의 시기에 슬픔이 나에게로 왔다. 실연의 상처, 가난의 고통, 고독감 등 나를 슬프게 하는 것들이 널브러져 있었다. 나의 그림은 갈 길을 잃었고 나의 일상마저도 잠시 스톱이 되었을 때, 어느새인지 슬픔의 깊숙한 그곳에 내가 있었다. 그곳은 고요하고 따뜻했다. 결코 어둡지 않았고 빛은 더 선연했다. 그때 더 이상 바깥세상의 불공평함과 부조리에 대응해 싸우지 않아도 되는 평온의 세상을 얻었다. 그것은 바로 슬픔을 수용해서 깨달은 ‘기쁨’이었다(무례한 말이지만 그땐 정말 그랬다). 그럼으로써 나의 그림은 ‘슬픔’이 화두가 되었고, 내 슬픈 감정들은 자연스럽게 나의 화면을 오고가며 날갯짓을 했다. 떨칠 수 없는 내 안의 연민과 애정으로.

    슬픔의 힘은 기쁨을 수반하는 기초적 감정이다. 모든 것에서 기초는 최고의 힘을 지니고 있으며 그 힘을 바탕으로 확장되는 기쁨의 세계가 있다. 기쁨이란 곧 희열이다. 통증을 겪은 뒤 통증이 완화될 때 우리는 달콤한 카타르시스를 맛본다. 이렇듯 슬픔이란 기쁨을 배가시키는 원초적 힘이다. 하지만 슬픔이란 것은 결국 무형으로 존재한다. 그 실체는 우리의 안에 있고, 슬픔이 눈물이 아니라 칼이라고 비유한 것처럼 내면에 있는 슬픔을 어떤 무기로 쓰느냐가 슬픔의 가치기준이 아니겠는가.

    정호승 님의 <슬픔이 기쁨에게>라는 시는 그 당시 커다란 위안이 되었다. ‘나는 이제 너에게도 슬픔을 주겠다 / 사랑보다 소중한 슬픔을 주겠다 / 무관심한 너의 사랑을 위하여(중략)’에서는 힘겹고 어려운 사람이나 사회를 보듬는 주체가 되는 슬픔의 힘을 말하고 있다. 또 맹자는 사단설에서 ‘불쌍히 여기는 마음은 어짊의 극치이고/ 부끄러움을 아는 마음은 옳음의 극치이고/ 사양하는 마음은 예절의 극치이고/ 옳고그름을 아는 마음은 지혜의 극치이다’라는 말을 했는데 이 말은 측은지심을 기저로 한 ‘인, 의, 예, 지’의 인성론이다.

    상대가 슬픔을 겪고 있다고 할 때 인간은 그 상대를 미워할 수 없는 본성이 있다. 그것이 곧 측은지심이며 연민이다. 이처럼 측은지심은 세상을 따뜻하고 겸손하게 바라보게 하는 슬픈 감정 중의 하나다. 현재 우리나라 정치인들에겐 슬픔이 없다. 그래서 기쁨도 없다. 슬픔이 무엇인지도 모르고 측은지심도 없다. 그러하니 어떻게 따뜻한 세상을 만들 수 있겠는가.

    모든 진정한 사랑에는 슬픔이 있다. 진정한 슬픔은 모든 것을 사랑하게 한다. 슬픔은 타인(민중)의 고통에 대한 공감성이며 배려이다. 슬픔에 대한 성찰을 통해 이기적인 삶의 자세를 반성하고 슬픔의 승화를 통해 진정한 기쁨을 맞이할 때 우리는 또 한 번 슬픔의 아름다운 힘을 체감할 수 있을 것이다. 나는 오늘도 ‘찬란한 슬픔’을 노래한다.

    정진혜 (서양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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