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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년 04월 20일 (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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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춘추칼럼] 익숙함을 거부하기- 박형주(국가수리과학연구소장)

  • 기사입력 : 2016-09-30 07: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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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언제부터 ‘먹방’이 이렇게 유행한 걸까. 맛집 탐방이 대세고 멋진 셰프는 만인의 로망이다. 삶의 방식과 우선순위의 변화는 이렇게 여러 모양으로 우리 곁에 나타난다.

    그리움으로 추억하는 나의 유년기는 색다른 장면으로 가득하다. 먹을 게 풍족하지 않은 시절이었다. 먹기도 힘든 쌀로 술을 만드는 건 큰일 날 일이어서 동네에서도 가끔 밀주를 만들다가 적발됐다는 소문이 돌았다. 20세기 전반부의 미국 대공황 때 금주령이 선포된 후에 알 카포네 같은 갱단이 밀주 유통으로 부를 축적했던 걸 연상시킨다.

    학교 급식이 없던 시절이라서 아이들은 매일 도시락을 싸갔는데, 학교에서 도시락에 보리가 충분히 섞였는지 ‘도시락 검사’를 받았다. 보리밥도 못 먹는 사람들이 많은 판에 윤기 나는 쌀밥을 먹는 것은 부도덕한 일로 여겼으니까. 창이 있으면 방패가 나오는 법이다. 도시락 상층부에 보리를 얇게 도포해 검사를 통과하는 기술은 족보가 돼 전수됐다. 요즘 어디 가서 이런 보리 혼식 얘기를 끄집어내면 꼰대소리 듣기 딱 좋다. 진부하다는 소리를 들을까 봐 공포심에 눌린 아재와 아주매는 그래서 이런 ‘부족했던’ 시절 얘기를 피한다. 가르치려는 고질병이 또 도졌다는 소리까지 들으면 큰일이다. 세상에는 시류니 유행이니 하는 게 있으니 어쩔 수 없다고 생각한다.

    신세대에게 이런 예전 얘기는 진부하기만 하려니 생각하던 차라서 영화 ‘국제시장’의 성공은 사뭇 놀라웠다. 영화평론가들도 우호적이지 않았는데, 파독 광부와 간호사를 주제로 ‘궁상맞은 얘기는 진부하다’는 주류 프레임에 정면충돌했다. 지금 신세대에게 이런 시절을 살던 청춘의 궁핍함이 소통된다는 게 놀랍다. 그들에게도 예전 것에 대한 이해의 시선이 있는 건가. 그렇다고 신세대에게만 기성세대를 이해하라는 짐을 지울 수는 없다. 이질적 요소를 가진 두 그룹 간의 이해는 쌍방향이어야 한다. 변화의 한가운데서 몸으로 변화를 맞는 세대와 오랜 세월 익숙해진 삶의 방식을 지닌 채 생경한 변화를 관찰하는 세대의 상호이해가 쉬울 리가 없다. 이래저래 구세대도 꼰대 탈출의 비결을 고민하는 지경이 됐다. 꼰대라는 말은 꼬장꼬장하다는 의미를 넘어서 불통의 아이콘이 됐으니까.

    이럴 때 떠오르는 온고지신(溫故知新)이라는 말은 동서고금을 통틀어 유효함이 증명된 비책이다. 옛것을 지킨다는 온고는 알겠는데 새것을 아는 지신은 쉽지 않다. 눈을 바짝 뜨고 시대의 변화를 관찰해야 하지만, 이걸 어디서 시작해야 할지 막막하다. 군자선가어물(君子善假於物). ‘순자(荀子)’에 나오는 말로, 군자는 물건을 잘 다룬다는 의미다. 요샛말로 하면 군자는 기크(geek)에 가깝다는 말이려나. 무릇 군자는 새로운 것을 받아들이는 일에 게으르면 안 된다는 뜻이기도 하니, 얼리어답터라는 의미로 해석할 수도 있겠다. 얼리어답터는 흔히 새로운 기술과 상품을 전위적으로 채택하고 실험하는 사람을 일컫는다. 이런 사람은 새로 나오는 장치들에서 이전에 없었던 아이디어를 보고, 그 아이디어를 제품으로 구현해내기 위해 필요했을 혁신을 통찰한다.

    예전에는 한 물건을 오래 쓰는 것이 미덕이었다. 하지만 요즘은 근검절약만으로는 나라의 경제가 성장하는 데에 한계가 있다고 한다. 새로운 혁신도 그로부터 탄생한 상품이 소비되지 않으면 사그라지니까. 아이폰이 처음 나왔을 때 정말로 혁신을 만들어낸 건 손에 찰지게 잡히는 예쁜 기계가 아니었다. 변화의 요체는 아이툰즈와 앱마켓이 보여준 연결된 세계의 비전이었다. CD 한 장의 열몇 곡을 다 사지 않아도 좋아하는 노래 하나를 아무 때나 구매해서 들을 수 있게 된 변화는 개인의 선택과 개성의 존중이라는 가치의 구현이었다. 애플은 변화를 두려워하지 않는 얼리어답터들을 등에 업고 낡은 주류 프레임을 순식간에 뒤집었다. 새로운 것을 써보고 그 신기함을 즐기는 사람들은 그 속에서 세상 변화의 실마리를 보며 혁신을 소비하고 지원한다. 익숙함에 안주하기를 거부하는 얼리어답터들을 응원하는 이유다.

    박형주 (국가수리과학연구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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