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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7년 11월 24일 (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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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길예담] (33) 박경리 작가 소설 토지의 무대 ‘악양들판’

비극의 역사 감싸안은 풍요와 생명의 들판

  • 기사입력 : 2016-10-07 07: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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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하동군 악양면 한산사에서 최영욱 평사리 문학관 관장과 정민주 기자가 평사리 들녘과 섬진강을 바라보고 있다./김승권 기자/


    가을들판이 딸네 집보다 낫다는 말이 있다. 딸네 집 인심이 여간 후하지 않고서야 익어가는 들판만 못하다는 뜻인데, 가을들판의 넉넉함을 빗댄 표현이다. 하동읍에서 차를 타고 10분쯤 내달리면 악양면 평사리에 닿는다. 지리산의 비호 아래 섬진강과 만난 260만㎡(83만평) 넓은 터전이 눈앞에 펼쳐진다. 풍요로운 평사리 들판에 가을빛이 그윽하다. 오곡이 알알이 들어찬 땅을 보고 있자니 내 것도 아니건만 마음이 꽉 찬다. 생명력 넘치는 이 너른 들판을 모티프 삼아 우리나라 대표 소설 ‘토지’가 태동했다.

    고 박경리 작가는 1969년 소설 토지를 집필하기 시작해 1994년까지 25년에 걸쳐 우리 민족의 이야기를 16권으로 완성했다. 원고량도 방대한데, 원고지 4만 장에 600만 글자, 등장인물만 무려 600여명에 달하는 그야말로 ‘대하소설’의 표본이다. 동학혁명부터 8·15 광복까지, 집필시간만큼 소설 흐름도 긴 호흡을 갖고 있다. 그중 하동군 악양면 평사리를 무대로 소설의 1부가 펼쳐진다.

    평사리에서 2008년 작고한 박경리 선생의 문학세계와 토지의 가르침을 이어가는 이가 있다. 하동에서 나고 자라 ‘토지’ 지킴이로 살고 있는 최영욱 평사리문학관장이다. 최 관장은 박경리 선생의 ‘문학을 하고 싶은 젊은이들에게’라는 산문집을 읽고 매료돼 선생의 작품을 파고들었다. 최 관장은 고향인 하동에서 ‘최참판댁’이 복원되자 이왕 만들어진 공간을 잘 꾸려보고 싶은 생각에 박 선생을 찾았다. 원주를 일곱 번이나 방문한 끝에 달가워 않던 선생에게 토지문학제 개최와 문학상을 제정하는 것을 승낙받았다. 단, 상 이름에 토지 대신 평사리를 넣는 것을 전제로. 박 선생은 후배의 간청에 책과 사진, 아끼는 물건도 아낌없이 선사했다. 이렇게 시작된 인연으로 지금까지 박 선생의 뜻을 전하고 있다.



    비 내리는 가을 오후, 악양들판이 한눈에 보이는 전망대에서 7일 문을 여는 ‘토지문학제’ 준비에 여념이 없던 최 관장을 만났다. 손 닿으면 물들 것 같이 새파란 하늘과 바람에 사르륵 소리를 내는 나락이 황금빛으로 물든 모습을 기대했지만 얄궂은 날씨 탓에 그 풍광을 누리지 못했다. 대신 산자락 어깨까지 내려온 구름과 빗소리가 주는 운치를 만끽하며 토지 속 토지를 마주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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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하동군 악양면 박경리 문학관.

    까치들이 울타리 안 감나무에 와서 아침인사도 하기 전에 무색옷에 댕기꼬리를 늘인 아이들은 송편을 입에 물고 마을길을 쏘다니며 기뻐서 날뛴다. 어른들은 해가 중천에서 좀 기울어질 무렵이래야, 차례를 지내야 했고 성묘를 해야 했고 이웃끼리 음식을 나누다 보면 한나절은 넘는다. 이때부터 타작마당에 사람들이 모이기 시작하고 들뜨기 시작하고―남정네 노인들보다 아낙들의 채비는 아무래도 더디어지는데, 그럴 수밖에 없는 것이 식구들 시중에 음식 간수를 끝내어도 제 자신의 치장이 남아 있었으니까. 이 바람에 고개가 무거운 벼이삭이 황금빛 물결을 이루는 들판에서는 마음 놓은 새 떼들이 모여들어 풍성한 향연을 벌인다. “후우이이― 요놈의 새 떼들아!” -토지 제1부 1장 ‘어둠의 발소리’ 일부-



    토지는 1897년 한가위 모습을 그리며 대서사의 문을 연다. 이 시기는 농민전쟁과 갑오개혁, 을미의병 등이 차례로 근대사의 연표를 아로새긴 때다. 당시의 아픔을 훑어냈건만 이 작품의 시작은 풍요롭기 그지없다. 여유로움은 넓디넓은 평야 덕택이다. 이렇듯 완만한 지리산 자락 섬진강 물줄기를 따라 생명을 움 틔우는 평사리 평야에서 토지는 탄생했다.

    박 작가의 고향은 통영이고, 진주에서 학창시절을 보냈으며 서울과 원주에서 여생을 살았다. 하동과는 별다른 인연이 없었다는 얘기다. 어떻게 하동 평사리를 무대로 대작을 지었는지 궁금해졌다. 최 관장은 “엄동설한에 젊은 아낙이 어린 아들을 들쳐업고 만석지기 집에 동냥을 하러 갔다가 쫓겨나 모자가 굶어 죽었대요. 애기 엄마가 길 위에서 죽으면서 오늘 두 입은 먹을 게 없어 굶어 죽지만 너희 집 곳간에는 먹을 것이 넘쳐나도 먹을 입이 없을 것이라고 했답니다. 할매(최 관장은 박 작가를 할매라고 불렀다)가 어릴 때 외할머니한테 들은 이 이야기가 계속 머리에 맴돌았나 봐요. 이 내용으로 소설을 쓰고 싶어 무대를 찾던 중 우연히 악양들판을 보고 무릎을 치셨답니다”고 답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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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박경리 문학관 내부.

    마지막 산문집에 친척 집을 가다가 우연히 들렀다고 적혀 있는데, 대학원 학위논문을 준비하는 딸과 평사리에 있는 한산사 대웅전의 국보급 탱화(경상남도 문화재자료 제286호)를 보러 왔다가 선생이 1967~1968년께 10분쯤 스쳐간 곳으로 직접 들었단다.

    박 작가가 평사리를 주배경지로 삼은 이유로, 첫째는 만석지기를 주인공으로 설정해 넓은 평야가 필요했고, 다음으로 지리산이 안고 있는 우리 민족의 비극적인 역사가 뒷받침이 됐기 때문이라고 생전에 밝혔다. 또 소설 속 주인공들이 쓰게 될 토속적인 언어로 나고 자란 경상도 방언을 쓰고 싶어서 섬진강을 끼고 있는 경남의 끝자락을 택하게 됐단다.

    그런데 정작 박 작가는 작품을 쓰는 내내 하동을 찾지 않았다. “선생님은 한 번도 가본 적 없는 평사리 최참판댁과 간도의 이미지를 축소한 지도만 보고 완벽하게 그려내셨어요. 탈고 후 간도와 평사리를 가보시고는 상상력과 현실이 닮아 있는 부분이 많아 놀랐다고 하세요.” 최 관장은 10년도 더 된 일을 생생하게 기억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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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박경리 문학관에 전시 중인 대하소설 토지.

    지난 2001년 11월, 박경리 선생은 토지를 묶어낸 지 7년이 지나서야 평사리를 찾았다. 마을 사람들이 길가에 나와 선생을 맞았는데, 거친 농부의 손을 맞잡고 그리도 반가워하셨단다. 투박하지만 생명력이 살아 있는 그들의 손에 대한 경외였으리라. “사실 선생의 손도 글 쓰는 손이 아니에요. 삯바느질을 하고 밭을 일궜기에 손이 거칠었죠. 땅의 소중함을 누구보다 잘 알았기 때문에 토지를 쓰실 수 있었던 것 같아요.” 최 관장의 말에서 뭇 생명을 키워내는 토지가 선생의 글밭을 일구는 문학적 토양이 됐음을 어림잡아 헤아릴 수 있었다.

    2004년 평사리문학관 개관식에서 박 작가는 꾸며 놓은 최참판댁의 고래등 같은 기와를 바라보며 당신 작품으로 말미암아 지리산이 훼손된 것 같아 가슴이 아프고, 지리산에 미안하다고 말씀하셨다. 이러한 박 작가의 ‘생명존중’ 신념은 생전의 인터뷰와 작품에서도 알 수 있다. “모든 생명을 거둬들이는 모신과도 같은 지리산의 포용력” 덕분에 글쓰기를 마칠 수 있었다고 회고한 바 있다. 모신은 인간의 제도와 불화한 자들을 안아들이는 존재다. 산문집 ‘가설을 위한 망상’에선 미천한 생명과 풀벌레에도 삶과 생명이 있음을, ‘생명의 아픔’에서는 자연과 인간의 공생을 날카롭고 준려하게 일깨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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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살아 있는 들판을 걸었다. 논마다 빼곡히 맺혀 있는 농부의 노고에 숙연함이 느껴진다. 얄궂은 표정으로 농부의 밑천을 지키는 허수아비가 새삼 고맙다. 방대한 이 소설에는 처음부터 끝까지 생명의 무게가 고스란히 실려 있다. 소설 토지는 자연을 그리며 세상을 사랑하고, 생명에 대한 치열한 선생의 애정이 바탕이 됐기 때문이다. 코스모스를 벗삼아 들판을 걷는 내내 온전한 생명에 대한 존중이 없어진 요즘, 그 무거움과 소중함을 깨달으라는 선생의 당부가 귓가에 울린다. 정민주 기자 joo@knnews.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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