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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년 04월 19일 (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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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춘블루스 시즌2 우리 동네 청춘] ‘조각 하면서 젖소 키우는’ 조각가 감성빈 씨

축사와 작업실 오가는 그 남자의 이중생활

  • 기사입력 : 2016-10-12 22: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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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이미 그는 지역사회에서 꽤나 촉망받는 작가 같아 보인다. 본격적으로 창원에 정착해 작품을 선보인 게 2013년부터라는데, 3년여 만에 2번의 개인전과 30여 차례의 단체전에 작품을 출품한 이력을 갖고 있었다.

    작품이 이국적이면서도 따뜻하다는 평을 받는다. 이런 걸 두고 전도유망하다고 해야 하나. 하지만 속사정이 꼭 그렇지만은 않아 보였다. 그는 ‘조각을 하면서 젖소를 키우는’ 꽤나 독특한 방식으로 30대를 꾸려나가고 있다.


    ◆미술을 할 줄은 나도 몰랐다

    인터뷰가 있던 날 태풍이 왔다. ‘차바’였다. 점점 거세지는 비바람을 보며 망설였다. 이대로 진행할 것인가. 기자가 우왕좌왕하는 동안 감성빈(34)씨는 이미 카페 문을 열고 들어오고 있었다. 오는 길에 가로수가 뿌리째 뽑혀 나가는 것을 목격했다고 했다. 그 말을 건네는 그의 눈은 강처럼 고요했고 따뜻했다. 미술을 하게 된 이야기부터 시작했다. 그는 26살 늦깎이로 경남대 미술교육과에 입학했다.

    “창원기계공고를 나와서 2002년에 창원공단에 취직해 4년 정도 일했어요. 엘리베이터 부품 공장이었는데 하청 중에서도 가장 하도급이었거든요. 기계도면을 볼 줄 알았기 때문에 생산직 관리를 맡았는데, 그때 정말 많은 생각들을 했어요.”

    산업재해를 당해도 오히려 잘릴까봐 전전긍긍하는 가장, 월급날이면 어김없이 남편에게 월급을 봉투째 빼앗기는 여사원…. 그들이 순응하는 삶을 그대로 따라가서는 안 된다는 생각이 들었다.

    “밤에 미술학원, 새벽에 독서실 다니면서 대입 준비를 했어요. 잔업까지 마치면 너무 늦은 시간이라 공장 기계에 영단어 붙여 놓고 외워 가며 일했죠. 미술을 택한 건 학교 다닐 때 유일하게 칭찬을 받았던 게 그림을 그리는 거였기 때문이었습니다. 그게 다예요. 사실 제가 미술을 할 줄은 저도 몰랐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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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감성빈 조각가가 그의 작품 '심연' 앞에서 인터뷰를 하고 있다. /성승건 기자/

    ◆조각가로 살기로 하다

    미술교사가 되려고 대학에 갔건만 막상 가보니 꼭 그것이 전부는 아니라는 생각이 들었다. 결정은 단호했고 실행은 빨랐다. 한 학기를 다니다 자퇴서를 내고 한 달 만에 베이징으로 날아가 베이징중앙미술학원 조소과에 입학했다.

    “조각을 택한 이유는… 외향적이기 때문입니다. 조각은 자기 하나로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3차원 공간에서 다른 것과 관계를 맺고 있잖아요. 그리고 개인적으로 작품을 한다는 것은 노동에 가까운 측면이 많다고 여기기 때문이에요. 쇠나 흙 같은 물질을 다루는 게 육체적으로 쉬운 게 아니거든요. 몸으로 부딪혀 땀을 흘리는 거죠. 늘 그렇게 살아왔고, 앞으로도 그럴 겁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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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감성빈 조각가의 작품 '심연'. /성승건 기자/

    ◆어쩔 수 없는 일들이…

    베이징에서 한국인 유학생을 대상으로 하는 미술입시학원 강사로 일했다. “돈이 꽤 됐어요. 스튜디오를 따로 내 작업할 정도로 형편이 좋았거든요. 그런데 중국이 워낙 유착비리가 심하잖아요. 입시 과정에서도 그런 불합리의 민낯이 여과 없이 드러나더라고요. 처음엔 아이들 가르치고 작품하면서 눌러 살 마음이었는데….”

    그러던 감씨는 예기치 못한 큰 사고를 당하게 된다. 오토바이 사고였다.

    “얼굴 형체를 알아볼 수 없을 정도였어요. 치아가 모두 나갔으니까. 병원을 3곳이나 옮겼지만 제대로 치료를 받지 못하고 귀국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갑작스런 귀국 후 완치까지 꼬박 1년이 걸렸다. 하지만 몸이 아픈 건 그래도 견딜 만한 것에 속했다.

    “귀국하고 한 달 만에 2살 터울 나는 형이 사고로 돌아가셨어요. 사고라는 것이 예고가 있겠냐만 정말 예기치 못한 일이었거든요. 부모님이 먼저 무너지셨어요. 저는 그 이후로…. 다시는 작품하지 못할 거라 생각했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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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창원시 의창구 북면 젖소 농장에서 감성빈 조각가가 소에게 사료를 주고 있다.

    ◆형을 대신해 젖소를 키우며

    감씨의 하루 일과는 새벽 6시에 시작된다. 60여 마리의 젖소가 있는 축사로 출근한다. 착유하고, 사료 주고, 청소를 하다 보면 3~4시간이 훌쩍 지난다. 일을 마치면 축사 옆에 있는 30평 남짓의 작업실에서 조소작업을 한다. 해가 기울어 오후 4시가 되면 새벽에 했던 일을 다시 반복하고, 그 일이 끝나면 밤까지 다시 작업실에 틀어박힌다.

    다시는 작품을 할 수 없을 것 같던 암담함은 오히려 작품을 함으로써 그 농도가 옅어져 갔다. 이런 생활을 이어온 지도 3년. 형이 하던 일 그대로, 30년 동안 창원 북면에서 젖소를 키워온 부모님과 생업 전선에 뛰어들었다.

    “형이 저 세상 간 날도 어김없이 젖을 짜고 사료를 먹였어요. 사는 게 그렇게 아이러니한 거더라고요.” 젖소를 키우는 일은 상당한 인내와 끈기를 요했고 그것은 그를 물리적으로, 또 일정 부분 심정적으로 많은 것들을 포기하게 만들었다.

    “유럽이나 중화권에 레지던시 기회가 많았는데, 못 갔어요. 하지만 어쩔 수 있나요. 어쩔 수 없는 일은 어쩔 수 없는 것 아닐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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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감성빈 조각가가 창원시 의창구 북면 젖소 농장에서 소들에게 사료를 주고 있다./성승건 기자/

    ◆내게 아름다움이란

    그는 주로 사람의 형상을 빚는다. 흙으로 형태를 빚은 뒤 석고로 거푸집을 만들고, 그 안에 다시 석고를 부어 형태를 뜬다. 그 위에 실리콘 거푸집을 만든 뒤 레진을 부어 형상을 만들어낸다. 붓질로 색을 칠한 뒤, 마감을 따로 하지 않는 것이 감씨가 빚는 작품의 특징이다. 그 형상들은 모두 조금은 슬프고, 약하고, 그래서 조금은 상처받은 모습과 희박한 빛을 띤다.

    “소중한 존재를 잃어본 사람은 타인의 아픔을 돌아볼 여유를 가지게 되나 봐요. 제 작품은 일종의 자화상이죠. 직접적으로 그리지 않았을 뿐. 신기한 건, 그런 작품에 관람객들은 각자 자신의 이야기를 덧입혀 공감하는 거였어요. 내 이야기가 누군가의 거울이 된다는 것, 사람과 사람의 매개물이 된다는 것, 그것이 제가 추구하려는 아름다움이에요. 타인을 위로하는 정신적 아름다움이 제가 생각하는 진짜 아름다움이거든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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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감성빈 조각가가 작품 활동을 하고 있다./성승건 기자/

    ◆지역에서 청년작가로 산다는 건

    지역에서 청년작가로 산다는 것에 대해 조심스레 말을 꺼내봤다. 힘들다는 이야기가 돌아왔다.

    “미술시장이 제대로 형성돼 있지 않으니 사는 게 힘들죠. 다들 아르바이트를 하며 작품을 합니다. 그러다 주객이 전도되기도 하는 것이 사실이에요. 10~20년 뒤에 제가 어떻게 살지 모르는 거 아닌가요. 지금은 이렇게 젊은 작가라고 인터뷰도 하지만…(하하). 지역 현실은 냉정하거든요. 좋은 환경에서 작업하지 못했기 때문에 작품을 잘하지 못했다는 핑계를 댈 순 없어요. 지역에서 청년작가로 산다는 건 계속해서 매일같이 다짐해야 하는 일이랄까요. 중간에 그만두면 무엇을 했든 얼마나 유망했고 촉망받았든 상관없이 ‘끝’인 게 예술이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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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감성빈 조각가가 축사 옆 작업실에서 작품 활동을 하고 있다./성승건 기자/

    ◆지역 문화예술에 대해

    지역 문화예술에 대해서도 할 말이 없지 않을 터. 젊은 작가의 시각이 궁금했다.

    “인(in) 서울해야 미술작가로서 성공할 수 있다는, 지역 중심으로 보자면 악순환이라고 할 수 있는 고리를 조금씩 끊어야 할 거 같아요. 그러려면 이곳을 신나고 재밌는 공간으로 만들어야 하고, 그래야 후배들이 크고 지역예술 저변이 넓어지는 선순환이 시작되지 않을까요.”

    감씨는 스스로 선배 지역작가들이 기획한 전시나 프로젝트에 ‘업혀서’ 자란 측면이 많다고 본다. 때문에 본인도 후배들을 ‘등에 업고 성장하는’ 역할을 해야 한다고 믿는다. 때문일까. 그는 지난 5~6월 치러졌던 창원아시아미술제 기획에 참여해 청년작가들의 작품을 알리는 데 힘썼다.

    “보통 전시기획이 그 지역이 아닌 밖에서 유입된 주체에 의해 주도하는 경우가 많아요. 풀뿌리 문화가 꽃피는 것을 보고 싶었어요. 지역의 젊은 작가들이 보다 부각되는 것이요. 첫술에 배부를 수 있나요. 앞으로 계속해서 그러한 시도를 해나가야죠. 저는 일종의 숙명처럼, 여기를 떠날 수 없잖아요. 그러므로 ‘여기가 아니야’ 하고 부정하고 있을 수만은 없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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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먹고살 수만 있다면

    미친 듯한 비바람이 몇 차례 지나가고, 조금씩 구름이 걷힐 무렵 마지막 필수 질문을 던졌다. 동시대 동일 지역을 살아가고 있는 청춘들에게 한마디 해달라고.

    “작가로 살아가는 것을 망설일 때 제가 우상으로, 멘토로 삼을 만한 분들을 만나면 ‘미술 해서 먹고살 수 있느냐’고 묻고 다녔어요. 묘하게도 그분들 답은 늘 같았어요. ‘먹고살 수는 있다’, 시쳇말로, ‘아무리 힘들어도 죽지는 않을 거다’는 말이었겠죠. 그런데 그게 이상하게 힘이 되더라고요. 정말 죽지는 않겠구나 하는 안심?(하하). 그래서 이 길을 택했어요. 지역에서 작가로 살기로. 솔직히 밥만 굶지 않으면, 해보고 싶은 일 한번 해보는 것이 좋은 거 아닌가요?”

    김유경 기자 bora@knnews.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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