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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년 04월 25일 (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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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속으로] 조선 찻사발 맥 잇는 산청요 민영기 장인

“고향 산청 좋은 흙에 선조의 얼 불어넣어 빚습니다”

  • 기사입력 : 2016-10-13 22: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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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명인(名人). 손끝으로 빚어내는 아름다움이 가히 최고라 할 만한 이를 부를 때 쓰는 단어다. 특히 400여년 전 일본에 빼앗긴 우리 도자기 역사의 뿌리인 조선 찻사발을 현세에 부활시킨 일이라면 명인이라는 말도 부족할 듯싶다.

    소강 민영기(69) 도예가. 자신이 빚어내는 찻사발만큼이나 꾸밈없고 소박하기 그지없는 그는 지리산 자락인 산청군 단성면 강누방목로에 전통한옥으로 자리 잡은 ‘산청요’에서 생활하고 있다. 산이 많은 산청에서도 미산으로 꼽히는 둔철산과 경호강이 바라다보이는 곳이다. 명인이 40여년을 하루같이 흙과 함께 살 만한 풍광이다.

    산청요는 조선시대 일본으로 건너가 일본의 국보가 된 ‘조선사발’인 이도다완(井戶茶碗)을 원형에 가깝게 재현했다는 평가를 받아온 소강 민영기(素崗 閔泳麒) 도예가가 1978년부터 운영해 온 가마다.

    민영기 도예가는 이미 한국과 일본에서는 그 명성이 대단한 인물이다. 일본의 제79대 총리를 지낸 ‘호소카와 모리히로’가 직접 도예를 배우기 위해 산청요를 4번이나 찾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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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도예가 민영기씨가 도자기 상태를 확인하고 있다.

    ◆조선 도공의 전통방식 그대로 만드는 찻사발

    민영기 선생의 도예 작품은 사발. 그중에서도 찻사발이 주를 이룬다. 찻물을 담는 그릇, 흔히 다완(茶碗)이라고도 한다. 그의 작품에서는 흙이 드러내는 색과 질감, 여기에 흙을 다듬어간 손끝의 미세한 떨림까지 고스란히 느낄 수 있다. 부르는 이름은 같은 찻사발이지만 어느 하나 같은 것이 없다.

    민 선생은 미련할 만큼 고집스럽게 전통방식에 따라 사발을 빚는다. 주재료인 흙은 직접 주변 산에서 캐와 마련한다. 숙성을 거친 흙은 발로 밟아 이겨 질을 만든다. 그제야 물레를 돌릴 준비가 끝난다. 물레로 차 모양으로 잡은 사발은 다시 한 번 깎아 낸다. 그 위에 유약을 입히고 말려 흙가마에 장작으로 구워낸다. 그 옛날 우리 도공들의 작업 방식 그대로다.

    40여년이 넘게 해온 일이 질릴 법도 하건만 선조들의 얼이 담긴 그릇을 현세에 다시 만든다는 자부심이 있어서일까. 사발을 받쳐드는 손길에서는 한 치의 지루함도 느껴지지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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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민영기씨 작품.

    ◆한국·일본서 최고 경지 도예가로 인정

    민영기 선생은 일본에서 도예에 입문했다. 1973년 문공부 추천으로 일본에 가 인간 국보에 오른 나카사토 무안(中里無庵)선생의 문하에서 도예를 시작했다. 이후 하야시야 세이조(林屋時三) 전 도쿄국립박물관장의 배려로 조선시대 전래품으로 일본에서 국보급 대우를 받는 20여 점의 다완들을 직접 만져 보고 배울 수 있는 기회를 얻게 된다. 또 정양모 전 국립중앙박물관장의 조언에 힘입어 꾸준히 도예의 길로 정진해 왔다.

    민 선생은 이미 한국과 일본에서 명성이 자자하다. 그가 만드는 찻사발은 이미 최고의 경지에 올랐다고 평가받는다. 그가 만든 사발이 국내외에서 최고의 찻그릇으로 극찬받는 이유는 전통방식을 고집하며 우리 선조들의 혼이 깃든 사발을 만들기 위해 끊임없이 정진해 왔기 때문이다.

    1990년대 초 일본에서 조선시대 도공이 만든 찻그릇을 접한 뒤 5년 동안 하루에 300개가 넘는 찻그릇을 만들고 부수며 복원에 매달렸다. 그렇게 부활시킨 민영기 선생의 조선 찻사발은 명품으로 인정받고 있다.

    특히 차 문화를 ‘다도’라 부르며 발전시켜온 일본인들이 그의 작품을 높게 평가한다. 그중에는 호소카와 모리히로 일본 전 총리도 있다. 호소카와 총리는 그의 작품에 깊은 애정을 가지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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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도예가 민영기씨가 자신의 작업실에서 도자기를 만들고 있다.

    ◆임진왜란 때 끌려간 조선 도공들, 일본의 국보를 만들다

    일본인들이 다도에서 가장 중요한 것 중 하나로 꼽는 것이 바로 찻사발, 다완이다. 일본인들은 이도다완(井戶茶碗)을 다완 중 최고로 삼는다. 일본의 국보로 지정된 기자에몬 이도다완이 대표 격이다. 그런데 이 이도다완은 일본 내에서 고려다완으로 총칭되는 우리 조상들의 그릇이었다. 즉 일본인들이 최고로 손꼽는 찻사발은 우리 선조들이 만든 다완이란 의미다.

    강철도 녹아내리는 섭씨 1300도 이상, 1500도에 가까운 고열의 가마에서 도자기를 구워 내는 기술은 당시 전 세계에서도 유례를 찾아보기 힘든 최첨단의 기술이었다. 그렇게 만들어진 고려의 다완은 일본 막부시대 당시 귀족 중의 귀족만이 누릴 수 있었던 특권이었다.

    16세기 일본으로 끌려간 조선의 도공들이 빚은 찻사발 하나의 가치가 쌀 1만 석에서 5만 석의 값어치를 했다고 하니 에도 시대 일본인들이 다기에 얼마나 집착했는지 미뤄 짐작할 수 있는 부분이다.

    이 때문에 임진왜란 당시 1000명이 넘는 조선의 도공들이 일본으로 끌려가 도자기와 찻그릇을 만들어야 했다. 임진왜란이 도자기 전쟁으로도 불리는 이유다. 당시 일본으로 끌려간 조선의 도공들은 일본의 가라쓰 지역에 정착했다. 이들의 후손들은 지금까지도 일본 곳곳에서 도예가로 명성을 떨치는 이들이 많다. 민영기 선생이 배운 나카사토 무안 선생 역시 가라쓰 지역 도예가로 조선 도공의 후손으로 알려져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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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민영기씨가 아들 범식씨의 그릇 만드는 과정을 지켜보고 있다.


    ◆아버지 뒤이어 그릇 만드는 도예가 민범식

    민영기 도예가의 아들인 범식(41)씨는 어린 시절 산과 강에서 친구들과 노는 게 좋아 도자기에 대해 큰 관심은 없었다. 그러다가 고등학교 2학년 때 미대에 가고 싶은 생각이 들었고 대학 입학을 도예과로 하게 됐다.

    그는 “자신도 모르게 아버지의 영향을 받은 것 같다면서 이 길의 선택에 후회는 없다”며 “다소 힘들지만 대를 이어온 지도 어느덧 14년째. 매일 아침 8시부터 밤 9시까지 아버지 곁을 지키며 도예를 배우는 것이 재미있고, 즐기며 가업을 이어가고 있다”고 말했다.

    그는 이제 아버지의 울타리를 벗어나 홀로서기를 준비하고 있다.

    지난 6월에는 산청 산골박물관에서 생애 첫 작품전을 열기도 했다. 전통방식으로 만들되 그 속에 현대적인 미를 추구했다. 화장을 한 듯 하얀 분청을 입은 작품을 많이 선보였다. 푸른 빛의 옷을 입거나 산과 해, 꽃무늬 등 자연의 문양도 그려 넣었다.

    그러나 멀리서 보면 딱 우리네 식탁에 오를 법한 실용적인 그릇의 모양을 하고 있다. 유리관 안에 넣어놓고 감상하는 예술작품이 아닌 늘 손 닿는 곳에 두고 쓰는 ‘그릇’ 그대로다. 늘 생활 속에서 함께했던 우리 선조들이 빚은 사발의 모습을 고스란히 이어가는 듯하다.

    민 도예가는 “산청지역은 어느 지역보다 도자기를 만들 수 있는 좋은 흙이 많다”며 “이 좋은 흙으로 도자기를 만들기 위해 고향에서 아들과 함께 도자기를 굽는 것이 너무나 행복하다”고 말했다.

    글·사진= 김윤식 기자 kimys@knnews.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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