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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년 03월 29일 (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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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남시론] 옳은 일이 아닌 것은 안 해야 된다- 서휘(창원문성대 문헌정보학과 교수)

  • 기사입력 : 2016-10-19 07: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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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요즘 언론에 수많은 사건들이 소개되고 있다. 재벌 단체와 문화·스포츠 재단, 군납, 스폰서와 법조인, 농민과 경찰 등에 관련된 사건들이 연일 언론에 대서특필되고 있다.

    현재 사회 지도자 계층의 지위에 있음에도 불구하고 더 많은 무언가를 얻기 위해서 어떤 이는 비리에 연루됐으며, 다른 어떤 이는 무언가 석연치 못한 답변이나 결정으로 여론을 혼란스럽게 하는 일들이 벌어지고 있음을 접하며 우리와 같은 일반 시민들은 그저 답답할 뿐이다. 그래서 오늘은 “옳은 일이 아닌 것은 안 해야 된다”고 말한 영국의 윌리엄 윌버포스(William Wilberforce)의 행적이 유독 생각난다.

    윌리엄 윌버포스는 무려 46년간의 노력으로 영국에서 노예제도를 종식시킴으로 인해 ‘영국의 양심’으로 칭송되는 위대한 인물이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흑인노예제도 해방을 미국의 링컨 대통령과 남북 전쟁의 승리로 인해 1865년 미국 연방 수정헌법 13조가 통과됨에 의해 이뤄졌다고 생각할 것이다. 그러나 흑인 노예제도는 이보다 앞서 프랑스와 영국에서 금지됐다.

    당시의 노예제도는 세상에서 가장 참혹하고 슬픈 인권 유린의 현장이었다. 한 예로 당시의 문헌에 나타난 노예무역선에서 노예들의 모습은 쇠사슬로 묶인 채 가능한 한 많은 노예들을 운반하려고 옆 사람과 머리와 발이 서로 반대로 지그재그 형태로 밀착돼 눕혀진 채로 거의 몇 개월 동안 제대로 먹지도 못하고 대소변 또한 그 상태로 해결했다고 한다. 따라서 질병이 만연돼 운반 도중 거의 3분의 1 이상이 병사했다고 한다. 윌버포스는 이처럼 참혹한 노예제도는 물론이고 주변의 슬픔, 비극, 불의, 부조리, 고통에 눈감고 고개 돌리지 않으며, 이들의 문제 해결에 자신이 할 수 있는 모든 것을 다 바쳐 헌신한 사람이다. 그는 영국의 귀족 출신으로서 24세에 하원의원이 됐으며, 27세가 된 1787년부터 1833년까지의 46년 동안 노예제도의 완전 폐지를 위해 노력했다. 그리고 그는 이 법이 통과되고 나서 3일 후 세상을 떠났다.

    그는 노예무역이란 사회의 구조적인 악(惡)에 맞서 ‘노예무역 폐지 법안의 입법’이란 자신의 신념을 수십 년의 노력 끝에 관철시켰다. 노예무역을 구조적인 악이라고 호칭함은 노예무역이 대영제국(영국) 국가 수입원의 3분의 1 이상을 차지해 국가 입장에서도 쉽게 포기할 수 없는 절대적인 재정 수단이었기 때문이다. 따라서 노예 상인, 재벌, 식민지 기득권 세력, 왕족과 귀족들로 구성돼 있는 노예무역 지지자들은 윌버포스와 같은 노예무역 철폐 찬동자들을 매국노로 낙인찍어서 사회적으로 매장시켜 버렸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윌버포스는 이와 같은 중상모략과 비방 심지어는 암살 위협에도 흔들리지 않고 “옳은 일이 아닌 것은 안 해야 된다”는 신념 하나로 ‘노예무역 폐지 법안의 입법’을 이뤄내 영국과 세계의 역사를 바꾼 위대한 사람이다.

    그러나 윌버포스의 신념 그 하나에 의해서 입법이 이루어진 것은 아니다. 노예무역 폐지 법안이 의회에서 통과되기 위해서는 의결 정족수가 필요했을 것이다. 수많은 의원들이 경제적 이익보다는 양심에 의해 판단하고 그의 의견에 동조했기 때문에 가능했을 것이다. 과연 우리나라 정치인들을 비롯한 사회 지도자 계층에게 막무가내식 현란한 논조로 상대를 설득하기보단 당리당략을 초월해서 양심에 따라서 국가의 대소사를 판단하길 기대하는 것은 너무 무리한 요구일까? 요즘 언론에 회자되는 수많은 사건의 기사들을 접하며 새삼 “옳은 일이 아닌 것은 안 해야 된다”는 윌버포스의 신념이 그립다.

    서 휘 (창원문성대 문헌정보학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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