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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년 03월 28일 (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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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길예담] (34) 전영근 서양화가와 통영 강구안·남망산

평생을 바라본 통영 풍경은 평생의 작품 모티프

  • 기사입력 : 2016-10-20 22: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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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삶에서 어떤 변화를 가져오는 나이가 있다. 대개 앞자리가 바뀌는 때가 그렇다. 내가 겪은 세월이 새삼 크게 다가오니 마음가짐도 변하는 것일 게다. 공자도 나이에서 앞자리가 바뀔 때마다 삶이 변했다고 하니 나이가 꼭 숫자에 불과한 것만은 아닌 것 같다.

    60은 어떨까. 공자는 예순의 나이를 두고 ‘귀가 순해지는 나이’라고 했다. 그의 경우 “사사로운 감정에 얽매이지 않고 모든 말을 객관적으로 듣고 이해할 수 있었다”고 했지만 보통 사람이 예순이 됐다고 이런 경지에 오르는 경우는 거의 없다. 다만 많은 것을 받아들이고 또 여유로운 마음을 갖게 되는 경향은 있는 모양이다.

    올해 예순이 된 전영근 작가도 비슷한 변화를 맞았다. 통영 전혁림미술관을 찾았을 때 한쪽 벽면에 걸려 있던 그의 작품은 예전의 것과 확실히 달랐다. 즐겨 그리던 추상화 대신 통영 남망산이 보이는 강구안의 풍경화. 넉넉한 여백, 자연스러운 선, 따뜻한 색감이 눈에 띈다. 화가라 그런지 귀가 아닌 손이 순해진 것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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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전영근 화가와 김세정 기자가 통영항에서 이야기를 나누고 있다. 뒤로 남망산이 보인다./성승건 기자/

    그는 화려한 색채를 사용해 강렬하고 날카로운 느낌의 추상화를 그려왔다. 화폭은 딱 맞아떨어지도록 빈틈없이 채웠다. 달라진 장르도 그렇지만 작품에서 풍겨지는 분위기가 더욱 낯설다. 그런데 그림에서 느껴지는 왠지 모를 따뜻함과 여유로움이 어색하지 않고 자연스럽다.

    “나이가 들수록 비움이 좋아집니다. 확실히 세월이 가져다주는 변화라는 게 있어요.” 그가 말했다. 그는 나이가 들고 보니 딱 떨어지는 것이나 흑백논리를 고집하기보다는 많은 것들을 수용하고 싶다고 했다. “제가 화가니까 그림에서 가장 먼저 그런 변화가 드러나는 것 같아요.”

    그의 변화는 부친이었던 전혁림 화백의 발자취와도 포개진다. “아버지의 화풍도 65세쯤에 변화가 왔습니다. 아버지의 그림은 이전보다 색이 더욱 강렬하고 선명해졌어요. 여러 사물들이 등장하던 것이 갈수록 단순해졌고 색도 단순해졌습니다. 나중에는 딱 5개 정도의 색만 사용하셨죠.” 그가 회고했다. 같은 길을 걷는 부자는 비슷한 시기에 변화를 맞았지만 내용은 달랐다. 아버지는 색에, 아들은 선에 마음이 끌렸다. 아버지가 더 강하고 선명해졌다면 아들은 더 자유롭고 부드러워졌다.

    캔버스 속 풍경은 단출하다. 남망산과 바다, 항구에 정박한 배 몇 척이 전부다. 그는 힘을 빼고 손 가는 대로 자연스럽게 그렸다고 했다. 유화물감을 사용했지만 꼭 수묵담채화 같은 느낌이다. 색도 다 채워 넣지 않았다. 파란색과 보라색 중간쯤으로 보이는 부드러운 옅은 색이 바다와 산, 배에 군데군데 내려앉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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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그는 통영에서 나고 또 자랐다. 프랑스의 아카데미에서 수학했던 3년 정도를 제외하면 거의 평생을 통영에서만 머물렀다. 통영의 모든 곳이 작품 배경이지만 남망산이 한눈에 보이는 강구안은 더욱 특별하다. 그가 원래 살던 곳은 봉평동 해평마을 일대. 집 앞에 서면 멀리 통영의 바다가 보이는 곳이었다. 해안가 길을 따라서 30여 분을 걸어가면 강구안에 닿았다. 소년시절부터 청년시절까지 그는 무시로 그곳을 가서 바다와 남망산을 바라보곤 했다. 남망산이 한눈에 들어오는 풍경이 그렇게 좋았다고 했다.

    1970~80년대, 지금으로부터 30~40년 전의 통영 강구안과 남망산 풍경은 지금과는 사뭇 달랐다. 지금처럼 오가는 사람이 많지 않았고 항구에 정박하고 있던 배들은 큼지막한 철선이 아닌 자그마한 목선 몇 척이었다. 강구안과 남망산을 따라서는 기와집, 슬레이트집, 일본식 가옥과 선박수리소가 들어서 있었다. 모두 높지 않은, 야트막한 건물들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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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전영근 작가의 작품


    전 작가가 머릿속에 남아 있는 강구안과 남망산의 풍경을 들려준다. “올망졸망하고 아기자기한 풍경이었죠. 인위적이지 않은 자연스러운 시골 항구의 모습 그대로였어요. 당시엔 도선도 있었습니다. 사공이 노를 저어서 사람을 태우던 배요. 남망산 반대편에서 사람들을 태우고 남망산 앞까지 데려다주는 배였는데 제가 20대 초반까지만 해도 탔었습니다. 뱃삯이 10원이었던가 그랬던 것 같아요.” 그는 작품 속 자그마한 빈 배가 이때의 기억을 담은 것이라고 덧붙였다. “누구나 탈 수 있는 마음속의 배랄까. 과거에 대한 노스탤지어겠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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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전영근 화가와 김세정 기자가 통영항이 한눈에 내려다보이는 남망산으로 오르고 있다.


    가장 순수했던 통영의 풍경, 어렸을 때부터 청년이 될 때까지 수십년을 봐왔던 그 풍경이 그의 마음속에 박혀 평생의 창작 모티프가 됐다. 나이가 들어 좀 더 많은 것을 포용하고 싶어진 지금, 여유로웠고 자연스러웠고 포근했던 풍경이 다시 그의 마음을 흔들었다. “이 풍경이 있었기에 지금의 화가 전영근이 존재하는 겁니다.” 그가 작품 속 남망산을 물끄러미 응시하며 말했다.

    그와 함께 통영 강구안을 찾았다. 지금의 강구안 일대는 그의 기억 속 모습과 많이 달라졌다. 해안가 곳곳에는 프랜차이즈 카페와 식당, 모텔이 빼곡히 들어섰고 도보였던 길은 직선 도로로 정비됐다. 도로 위에는 차가 쉼없이 오갔고 평일이었는데도 주차장에는 차가 가득했다. 주차장은 해안가 일대를 매립해서 만들어졌다고 했다. 남망산 앞에는 오래된 선박 수리소 외에도 여러 건물들이 뒤섞여 있었고 멀리 미륵산 앞에는 산을 절반쯤 가리는 커다란 아파트 단지가 들어섰다. 모두 2000년대 들어 통영이 관광지로 각광받기 시작하면서 연출된 풍경이다. “안타깝죠. 예전의 풍경이 사라져버린 게.” 그의 목소리에 아쉬움이 짙게 묻어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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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그는 언젠가 추상으로 돌아가겠지만 그때의 작품은 예전과는 확실히 다를 것이라고 했다. “색도 선도 변화가 있겠죠. 이 작품처럼 자연스러운 느낌으로 추상을 이끌어내려고 합니다.”

    건물도 사람도 차도 빽빽한 강구안과 남망산 일대 풍경은 어딘가 자연스럽지 않았다. 해안가 길목에 세워진 청회색의 커다란 모텔 건물과 유명 프랜차이즈 가게들, 산 높이 절반을 차지하는 콘크리트 건물이 그랬다. 빈틈없이 꽉찬 강구안과 남망산 풍경 속에서 그의 그림이 오랫동안 머릿속에 맴돈다. 세월이 흐를수록 채움이 아닌 비움이 있는 풍경을, 또 그런 삶을 그려본다.

    김세정 기자 sjkim@knnews.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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