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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년 04월 24일 (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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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춘추칼럼] 절망을 즐기지 않기 위하여- 신형철(문학평론가)

  • 기사입력 : 2016-10-21 07: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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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세상에는 영화보다 중요한 것이 많지만 영화보다 중요한 것들을 생각하게 하는 중요한 영화들도 세상에는 있다. 김성수 감독의 영화 ‘아수라’는 천국의 장인이 건설한 지옥이다. 최상의 연출력임을 알겠으나 두 번은 볼 자신이 없다. 이 영화가 재현하는 폭력을 나는 견뎌내기 어려웠다. 특히 포식자가 피식자에게 일방적으로 가하는 폭력의 시청각적 자극을 이 영화는 마치 제의를 치르듯 준엄하게 쏟아 붓는다. 그들은 때리고 때리고 또 때린다. 이 영화에서 ‘때리다’는 동사가 아니라 형용사 같다.

    ‘폭력의 미학’이라는 말이 있다는 것을 알고 있고 또 있을 만하다고 생각하지만, 그것은 폭력적인 것에서 아름다움을 느낄 수 있을 때 떠올려야 할 말이다. 이 영화의 폭력이 내게는 아름답지 않았고 고통스러웠다. 고통스러운 폭력을 계속 감내하고 있다 보면, 그러고 있는 자기 자신에 대해 생각하게 되는 순간이 온다. 이 영화를 보면서 경험한 일 중 하나가 그것이다. 스크린 속에서 행사되는 폭력을 보면서 정작 내가 보고 있었던 것은 나 자신이었다. ‘나는 왜 여기에 있는가?’ 나는 왜 입장료를 지불하고 들어가서 편안한 의자에 앉아 타인의 고통을 구경하고 있는 것인가. 어떠한 쾌락도 없이, 스스로 고통을 당하면서.

    영화가 관객을 고통스럽게 하는 일이 그 자체로 옳거나 그르진 않으리라. 문학도 마찬가지다. 피해서는 안 되는 고통이 있다는 것을 안다. 최근 나는 한국사회의 끔찍한 본질을 집요하게 재현하는 한 소설가에게 지지를 표명하면서 이런 문장을 적기도 했다. “‘예술은 현실의 재현’이라는 유서 깊은 논의에서 ‘재현’이란 현상의 복사가 아니라 본질의 장악이다. 남길 것과 지울 것을 선택하는 지성이 필요한 일이다. 또 독자에게 고통을 전이시켜야 한다. 세상이 고통스럽다고, 고통스럽게 말해야 한다. 그것 없이는 인지의 충격이 발생하지 않기 때문이다.” ‘본질의 장악’의 부산물이자 ‘인지의 충격’의 유발자로서의 고통, 그것은 옳다.

    그러나 ‘아수라’가 그렇다고 말하기는 주저됐다. 인터뷰를 보니 감독의 취지는 내가 옳다고 생각하는 그것과 다르지 않았다. 이런 폭력성이 한국사회의 본질이기 때문에 피해서는 안 된다고 생각했고(‘본질의 장악’), 실상을 충격적으로 경험하도록 하기 위해 시각적으로나 청각적으로 가장 강한 자극을 가했다는 것(‘인지의 충격’). 그러나 이렇게 반문해야 한다. 이 영화는 우리가 미처 서 있어본 적이 없는 어떤 곳으로 우리를 데려가서 그곳에서만 보이는 한국사회의 본질을 볼 수 있게 하는가? 만약 그렇지 못하다면 그때 화면에서 재현/생산되는 저 폭력과 고통은 도대체 누구를 또 무엇을 위한 것일까?

    ‘아수라’가 이런 질문에 제대로 답을 하고 있는 것 같지 않다. ‘아수라’는 한국영화가 오랫동안 한국사회의 본질을 포착하기 위해 사용해 온 인식의 프레임(영화 제목을 빌리자면 ‘내부자들’의 ‘부당거래’로 굴러가는 대한민국)을 거의 그대로 받아들인다. 영화의 공간적 배경이 바뀐다한들 인식의 거점이 바뀌지 않으면 새로운 인식이 생산되지 않는다. 그 대신 폭력은 더 과감해졌고 고통은 더 끔찍해졌다. 심화될 수 있고 또 그래야만 하는 영역이 정체되자 다른 영역이 과잉 심화된 경우가 아닌가. 요컨대 ‘본질의 (새로운) 장악’이 없는 곳에서 도모되는 ‘인지의 (강화된) 충격’이란 공허할 뿐 아니라 부당한 것이다.

    어두운 극장에 여러 사람들과 함께 앉아, 뼈가 부러지고 살이 찢어지는 어느 인간의 고통을 관람하면서, 우리는 정말 무엇을 하고 있는 것일까. 이 세상은 지옥이었고 지옥이며 지옥일 것이라는 점만을 끊임없이 되새기면서 우리는 어떤 사람이 돼가는 것일까. 이제 우리는 도무지 바뀔 가능성이 없어 보이는 이 사회에 적응하기 위해 지옥의 엔터테인먼트를 발명하고 체념을 쾌락으로 바꾸는 법을 연습하고 있는 것일까. 정직한 절망은 소중한 것이지만 그것이 오래 반복되면 기묘한 향락이 된다. 우리는 허황된 희망과도 싸워야 하지만 즐거운 절망과도 싸워야 하지 않을까.

    신형철 (문학평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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