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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고’와 ‘사건’ 사이에서- 우무석(시인)

  • 기사입력 : 2016-10-24 07: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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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아주 자명한 사실도 해석의 층위에서는 다양한 부인(不認)의 말들 사이에 놓임으로써 본질적인 ‘사건’으로 인식되지 않는다. 대개는 재수가 없어서 당한 뜻밖의 횡액인 ‘사고’쯤으로 여겨버린다. 비극적인 ‘사건’을 개별적이고 예외적인 ‘사고’로 격하해버리는 현실 속에서 그것을 증명하려는 노력은 어쩐지 억울하고 답답할 정도로 난감해진다.

    1979년 10월 18일, 마산의 부마민주항쟁 당시 평범한 시민인 유치준씨가 정황상 국가공권력에 의해 사망한 ‘사건’은 자명한 사실이다. 그래서 2014년 10월 국무총리실 소속의 ‘부마민주항쟁진상규명 및 관련자 명예회복심의위원회’가 출범되자 유치준씨 유족들은 관련자 인정 신청을 그 누구보다도 먼저 신청했다. 그러나 위원회에서는 항쟁과 관련됐다고 여겨지는 몇 가지 긍정적 측면도 있지만, 사망자 발견 당시의 상태에 대한 객관적 자료 및 증언이 없다는 부정적 측면만 수두룩하게 나열하면서 항쟁 관련성을 인정하기 어렵다고 부인해버렸다. 심의에서 기각 결정을 내리기 직전인 지난 8월, 한계 상황에 내몰린 유족들은 자진해서 관련자 인정 신청을 철회하고 말았다. 증거자료와 정황을 더 확보해 차기 위원회에 제출할 생각이지만 현 정부에 대한 불신이 더욱 깊었기 때문이다.

    최근 위원회에서 진상조사 실무위원으로 활동해 온 정인권은 유치준씨 사망사건을 오랫동안 추적해 온 인지적 결과를 민주주의사회연구소의 기관지 ‘성찰과 전망’에 발표했다. 그 글에는 37년 전 분명 살아 숨쉬었던 유치준씨가 죽음에 이르기까지의 과정을 꼼꼼하게 유추하면서 고통의 실체를 분석했다.

    항쟁이 격해지던 그날 저녁 때, 그는 수출자유지역과 인접한 경남모직 공장신축 현장에서 일용직 노동자로 일을 마치고 집으로 돌아가던 중이었다. 시위로 인해 교통편이 끊겼으므로 어쩔 수 없이 완월동 집까지는 걸어가야만 했으리라. 그는 시위대와는 반대편으로 이동하면서 산호동에 있던 공화당사까지 오게 됐다. 때마침 한 무리의 시위대가 달아나고 이들을 쫓는 진압경찰들이 지나간 후 그의 뒤통수가 움퍽하니 깨어져 있었다. 의식이 희미해지는 상태였건만 그는 피를 흘리면서 정신없이 앞으로 나아갔다. 그러나 사망장소였던 새한자동차 영업소 부근까지 와서는 힘이 다해 길가에 주저앉았다가 다시 일어서려고 애를 썼지만 영영 일어나지 못했다. 왼쪽 눈두덩이 안면을 일그러뜨리며 부어 올랐고, 코와 입에서는 피가 줄줄 흘러내렸다. 그리고 다음날 아침 그는 싸늘한 주검으로 발견됐다.

    이후 그의 죽음은 유족들에게 알려지지 않은 채, 경찰이 임의 처리해 비밀리에 공동묘지에 가매장했다. 사망자의 소지품 가운데 주민증이 있었음에도 경찰은 유족에게 통보하지 않고 있다가 대통령 국장일을 하루 앞두고 파출소 순경을 통해 사망사실을 알려준 것은 명백히 은폐 의도가 있었기 때문이다.

    지그문트 바우만(Zygmunt Bauman)은 오늘의 세계가 ‘질서의 경색’ 상태라고 판단했다. 질서의 경색은 더이상 세계를 변화시키지 않는다. 변하지 않는 세계는 보이지 않는 것들을 더는 볼 수 없게 하는 세계다. 유치준씨 사망사건에 대한 위원회의 판단을 보면 그 조직이 이미 질서의 경색상태에 있음을 말한다. 국가폭력에 의한 희생자의 비극성을 위원회는 ‘사고’의 프레임으로 굴절시킨 것으로 항쟁의 의미를 제멋대로 깎아내린 것과 다름없다.

    우무석 (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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