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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년 04월 25일 (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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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을 보며] 새로운 고수(高手)를 기다리며- 이문재(사회2부장)

  • 기사입력 : 2016-11-03 07: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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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세상에는 딱 두 가지 부류가 있다. 고수(高手)와 하수(下手), 중간도 있을 법하지만 그런 것은 없다. ‘어, 나는 그렇게 빠지는 편이 아닌데’ 하는 사람은 틀림없는 ‘하수’이니, 어쭙잖게 ‘고수’ 흉내를 내지 않는 게 마음 편하다. 고수에게 세상은 참으로 살기 좋은 천국이다. 마음먹은 대로 일이 풀리고, 기분대로 해도 아무도 말리지 못한다. 재물과 곡식은 저절로 쌓이고, 물 쓰듯 해도 마르지 않는다. 하루하루 지나는게 아깝고, 즐거운 일상이 기다리는 아침이 행복하다. 반면 하수에게 세상은 지옥이다. 죽을 힘을 다해도 살림살이는 늘 빠듯하다. 재물이 쌓이기는 고사하고 빚만 늘어간다. 하루하루가 가시밭길이고, 그런 아침이 반가울 리도, 힘이 날 리도 없다.

    최순실. 대한민국 무림(武林)에 절정(絶頂)의 고수가 모습을 드러냈다. 그와 그 일당들의 등장으로 그간 우리가 알고 있던 수많은 고수들도 한순간에 하수로 전락했다. 그들은 하수 정도가 아니라 발밑에 엎드려 벌벌 기며 눈도 마주치지 못했던 것 같다. 모두가 최 고수에게 혈(穴)과 맥(脈)을 짓눌려 숨만 쉬고 있었다. 썩은 볏단처럼 스러져가는 가짜 고수들은 그래도 한때는 고수 흉내를 내며 달콤하게 살았을 것이니, 동정할 필요는 없다. 하지만 이 땅의 대부분인 모태 하수들은 절망과 마주한다. 자신이 하수임을 억지로 잊고, 악착같이 살아왔는데 또 다시 사악(邪惡)한 고수와 맞딱뜨린 심정은 참담하다.

    이른 찬바람에 하수들의 삶은 더욱 시리다. 줄어든 일자리에 취직을 하지 못하고, 다니던 직장에서도 밀려나고 있다. 이로 인해 노후나 큰일을 대비해 한푼 두푼 모아 왔던 보험이나 적금을 해약하는 일이 증가하고 있다. 중·하위 소득계층의 보험 가입이 약화되고 있고, 빈곤층의 2001년 보험가입률은 25%였지만 2012년에는 절반 수준인 11%까지 떨어졌다(보험연구원). 올해 9월까지 적금 중도해지 비율은 45.2%로 가계 상황이 어려워지고 있다는 방증이다(시중은행). 올해 2분기 말 현재 가계부채는 1257조원, 내년 말에는 9.8% 증가로 1460조원까지 늘어나 연간소득 대비 가계부채 비율은 약 159%에 이를 전망이다(현대경제연구원). 하수들의 암담한 미래를 알려주는 지표들이다.

    이런 와중에 출현한 그들은 하수들에게 절망과 실망, 배신감과 분노를 안겨주기 충분하다. 하수들은 우리 사회에 ‘공정’과 ‘평등’이 있다고 배웠고, 몇 번이나 뒤통수를 맞았지만 조금은 남아 있을 것이라 믿어왔다. 하지만 한순간에 무너졌다. 하수들이 목숨을 떼어놓고 해도 안 될 법한 일을 그들은 너무나 쉽게 해결하고 손에 넣었다. 돈과 권력, 명예까지 몽땅 챙겼다. 수천, 수만의 하수들을 조롱하고 좌절시켰다. 그는 ‘죽을 죄를 지었다’며 끌려갔지만, 지금은 ‘잘못한 게 없다’고 버티고 있다. 엄청난 내공이다.

    하수들은 이제 울분을 지나쳐 허탈감에 빠져들었다. 멘붕이다. 하지만 고수들을 털어보겠다며 정치판에서 진행되는 일에는 기대도 관심도 접어두자. 당장 필요한 게 ‘냉정’이다. 하수들은 흥분하면 백전백패다. 고수들이 노리는 것도 이것이다. 고수들에게 또다시 짓밟힐 수는 없다. 본래 가던 길 묵묵히 걸어야 간당간당한 삶이라도 지킬 수 있다. 그리고 사악한 무리들의 무공을 폐(廢)할 새로운 고수의 등장을 지켜보자.

    이문재 (사회2부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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