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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년 04월 25일 (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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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남시론] 느그 아버지- 박한규(대한법률구조공단 홍보실장)

  • 기사입력 : 2016-11-14 07: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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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대개 하늘이 만물을 내심에 오직 사람이 귀하오나 소인에게 이르러서는 귀함이 없사오니 어찌 사람이라 하오리까? 소인이 평생 서러운 것은 대감의 정기를 받아 당당한 남자가 돼 부모님이 낳아 길러준 은혜가 깊사온데 그 부친을 부친이라 못하고 그 형을 형이라 못하니 어찌 사람이라 하오리까?” 광해군(1608~1623) 때 허균이 쓴 이 땅 최초의 한글 소설 ‘홍길동전’의 일부분이다.

    여럿이 모이는 자리에 가면 참석자들은 두 부류로 나뉜다. 비중 있는 인물들은 주최 측에서 대신 소개한다. ‘내빈소개’, 참가자들은 손뼉을 친다. 대접받는 거다. 자리가 이어지면 비중 없는 인물들에게는 직접 소개의 기회가 부여된다.

    자리의 성격에 맞춰 소속과 직급 같은 필수 정보와 이름 정도를 밝힌 후 간단한 덕담으로 대응한다. 반면 격식도 중요하지 않고 성격도 모호하며 딱히 주최자도 없는 자리에서는 차별은 사라지고 자기소개 내용도 다양해진다. 이때마다 생각해 본다. ‘나는 누구인가?’

    자식도 나이가 들어 언제 마지막으로 그의 친구를 소개받았는지 기억조차 희미하다. 오히려 어린 시절 내가 친구 부모님을 뵈었을 때의 기억이 더 명확하다. 그분들께서는 늘 단도직입 질문 하나로 궁금증을 해소하셨다. “느그 아버지 뭐하시노?”

    글로 자기를 소개해야 하는 경우들도 적지 않다. 대학이나 로스쿨 입시, 기업 입사를 위한 자기소개서. 한때 ‘있는 집 자식들’이 로스쿨에 사실상 특혜 입학했다는 주장들이 명단을 근거로 제기된 적이 있다.

    그래서 내년부터 로스쿨이나 의학전문대학원 자기소개서에 부모나 친인척의 성명, 직업 등을 기재하는 것이 금지된다. 광해군 이후 근 400년 만에 ‘그 부친을 부친이라 못하고 그 형을 형이라 못하는’ 홍길동이 될 것을 요구하는 제도가 발효된다.

    1970년대부터 이 땅에 불기 시작한 부동산 투기 열풍으로 한 시대를 풍미한 단어가 있다. 졸부 (猝富)! 고시에 합격하거나 몇몇 자격증을 획득해 평생을 보장받던 시절도 있었다. 한탕주의! ‘틀이 덜 잡힌 세상’에서 가능한 일이지만 졸부든 고시 합격이든 자격증이든 최소한의 ‘자기’ 노력이 있어야 한다는 측면에서는 그나마 참을 만하다. 그런데 누구누구의 자식이라는 불로소득 하나만으로 평생 또는 인생의 중요한 대목이 결정된다면 이건 ‘틀이 없는 세상’이다.

    지금 우리나라를 바탕까지 흔들고 있는 듣지도 보지도 못한 사건에 자식들이 등장한다. 어느 전직 청와대 수석 비서관의 아들은 ‘코너링’을 잘하는 경찰청 인정 카레이서(car racer)가 됐고, 대통령이 ‘어려움을 겪을 때 도와준 인연’의 딸은 말을 잘 타서 어린 시절부터 지금까지는 여러 장애물을 잘 넘어 다닌 모양인데 둘 다 이번에는 실패하지 싶다.

    1971년 어느 중앙지에는 이런 광고가 게재됐다. “나이가 몇 살이건, 어느 학교를 나왔건, 지난날 무슨 일을 했건, 능력이 있는데 아무도 안 알아준다고 생각하는 사람은 자기소개서를 써서 사서함 00호로 보내라….”

    한국 잡지사에 큰 족적을 남긴 ‘뿌리깊은 나무’를 만들었던 한창기가 직접 썼던 브리태니커 백과사전 판매원 모집 공고다. 그가 부활한다면 저 광고 속에 한마디를 더 넣을까? ‘누구의 자식이든.’

    친인척의 후광을 무시할 자신이 없어 아비를 아비라 밝히지 못하게 하는 ‘엉뚱한 세상’이 나를 슬프게 한다.

    “느그 아버지 뭐하시노?”

    그리고 한마디만 더.

    “느그 아버지가 그리 가르치셨나?”

    박한규 (대한법률구조공단 홍보실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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