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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남시론] 100만 인파의 의미- 이택광(경희대 글로벌커뮤니케이션학부 교수)

  • 기사입력 : 2016-11-16 07: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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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00만의 인파가 서울 광화문에 모여 “대통령 퇴진”을 외쳤다. 서울이라는 장소성을 넘어선 ‘시민들’의 집결이었다. 누구는 봉기라고 했고, 누구는 거대한 콘서트 같다고도 했고, 누구는 엄청난 인파에도 폭력 없이 평화롭게 끝난 시위에서 대한민국의 힘을 느꼈다고도 했다.

    여하튼 언론들은 100만이라는 숫자와 질서정연하게 끝난 비폭력 평화시위를 강조했다. 이렇게 100만 명의 인파가 청와대를 ‘포위’한 듯 연출한 보도사진이 지면을 장식했다.

    장관은 SNS에서도 펼쳐졌다. 페이스북과 인스타그램은 집회에 나간 인증 사진으로 봇물을 이루었다. 가족 단위로 참여해서 자녀들과 함께 찍은 사진을 올리는 부모들도 없지 않았다. 종편 시사프로그램에 출연한 한 정치평론가는 6월 항쟁 때 서울역에 모인 인파를 회고하면서 “그때 대학교 2학년이었는데 지금 다시 100만 인파가 운집한 것을 보니 감회가 새롭다”고 전했다.

    법원도 청와대 코앞까지 인파가 진출할 수 있도록 이례적으로 허락했다. 그토록 소원이던 청와대를 바로 볼 수 있는 지점까지 ‘합법적’으로 나아갈 수 있었다.

    그러나 솔직히 그 법의 경계 너머를 나아가려는 제스처는 있었지만, 누구도 그 선을 넘지 않을 것이라는 사실을 알았다. 이미 집회가 열리기 전부터 ‘시민들’은 11월 12일이 ‘역사적인 날’이 될 것이라고 예감하는 듯했다. 암묵적으로 ‘시민들’은 100만 집회를 만들기 위해 힘을 합쳐야 한다고 생각했다. 마치 천만관객 영화처럼 그렇게 집회도 100만 명이 참여하도록 해야 한다고 너도 나도 믿었다.

    광화문에 모인 100만 명이 요구한 것은 무엇이었나. 체제 전복을 원한 것은 아니었다. 그랬다면 법원이 허락한 선을 거리낌 없이 넘어갔을 테다. 100만 명이 원한 것은 체제 전복이 아니라 체제를 정상적으로 다시 작동하게 만드는 것이었다. 박근혜 대통령만 제거하면 이 체제는 정상으로 다시 돌아갈 수 있다는 전제가 여기에 깔려 있다. 그러나 이런 인식은 모순적이다. 왜냐하면 이 정부는 대통령 없이도 4년이 운영되었기 때문이다. 장관과 수석비서관들이 대통령을 ‘독대’하기 쉽지 않던 정부였다. 대통령이 빠진 상태에서 이들은 각자도생했다. 어떻게 말하면 대통령은 언제나 이미 이 체제 내에 존재하지 않았던 것이다.

    이 상태가 비정상적으로 보이겠지만, 사실상 자유민주주의의 구조가 바로 이렇지 않은가. 통치하되 주권자는 보이지 않아야 한다. 권력은 국민으로부터 나오는 것이고 대통령과 같은 행정수반은 그 권력을 ‘대리’할 뿐이다.

    따라서 대통령의 인격은 보이지 않아야 한다. 박근혜 대통령은 역설적으로 이 역할을 누구보다 잘 수행하는 것처럼 보였다. 최순실 게이트가 불거지기 전까지는 말이다. 대통령은 아예 사생활 자체를 공개하지 않았다. 그는 인격화한 대통령이라기보다 상가 앞에 세워져 있는 등신 광고사진 같은 느낌을 주었을 뿐이다.

    그러나 최순실과 대통령의 관계가 밝혀지면서 이 모든 것은 갑자기 ‘기만’으로 판명 났다. 비인격성에 머물러 있던 대통령이 인격화하면서 ‘시민들’은 그 평범한 모습에 충격을 받은 것인지도 모른다.

    갑자기 대통령의 이미지는 ‘레이저를 발사하는 카리스마 넘치는 정치인’에서 ‘보톡스나 맞으면서 희희낙락하는 유한부인’으로 전락했다. 한국 사회에 만연한 여성혐오는 이런 이미지 반전에 혁혁한 공을 세웠다. 종편에 출연한 정치평론가들은 연일 ‘강남 아줌마 최순실에게 놀아난 국정’이라는 표현을 여과 없이 쏟아냈다.

    100만 명의 인파가 ‘대통령 퇴진’을 한목소리로 외쳤지만, 새로운 것은 아무것도 없었다. ‘체제에 순치한 평화집회’여서 문제라기보다, 이처럼 과거의 귀환을 되풀이하고 있는 상황이 문제인 것이다. 87체제가 만들어놓은 도돌이표에서 계속해서 돌고 도는 이 무한 루프는 언제 끝날 수 있을까.

    87년도에 거리로 쏟아져 나왔던 그 ‘100만 학도’가 이제 민중가요와 만장을 버리고 대중가요를 부르는 ‘100만 시민’으로 바뀐 풍경에 가을이 담겨 있었다.

    이택광 (경희대 글로벌커뮤니케이션학부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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