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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년 03월 29일 (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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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을 보며] 영란, 순실에 무안 당하다- 이문재(사회2부장)

  • 기사입력 : 2016-11-29 07: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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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얻어 먹지도 말고 사주지도 말아라.’ ‘받지도 말고 주지도 말아라.’ 지난 9월 말 김영란법 시행으로 ‘혹시 괜한 낭패를 볼 일은 없을까’ 하고 누구나 마음을 졸였다. 적게는 몇만원, 많게는 몇십만원에 평범하게 살던 서민들은 주눅이 들었다. 가끔씩 하는 밥 한 끼, 술 한잔에 눈치를 살피게 됐고, 음료수 한 병 건네기도 무서운 세상이 됐다. 음식, 꽃, 과일, 축산, 어업 등으로 늘 빠듯하게 살아온 이 땅의 많은 서민들은 ‘살길이 막막해졌다’고 가슴을 내리쳤다. 하지만 대한민국은 너무나 태연했다. 부정이 없는 깨끗한 나라, 사사로운 청탁이 사라지는 정의로운 사회를 만들자는 데 ‘무슨 생떼냐’는 식이었다. 제도가 정착되면 어려움과 부작용도 점차 줄어들것이라고 했다.

    대다수가 당장 먹고살기가 힘들어졌지만 숨죽이고 참았다. 그간 보아온, 혹은 당해온 갑질과 부정부패에 진절머리가 났기 때문이다. 좀 어렵더라도 참고 견디면, 정말 맑고 정의로운 세상이 되리라고 기대했다. 전 재산을 털어 장사를 벌인 영세업주도, 새벽부터 늦은 밤까지 뼈가 으스러지도록 밭일을 하는 농민도, 목숨 걸고 파도와 싸워야 하는 어민도, 아이들과 학부모에 시달리는 교사도, 죽어라 일해도 폼나지 않는 공무원들도 모두가 착한 어린이마냥 몸과 마음을 낮췄다. 조금 덜 팔면, 조금 더 아껴 쓰면, 조금 더 궁색해지면 되겠지라며.

    경제 전문가들은 김영란법으로 인해 발생하는 경제적 손실이 11조원에 달할 것으로 예측했다. 법에 저촉되지 않기 위해 해당 분야 종사자들이 지갑을 닫거나 선물·접대 등을 받지 않기 때문이라는 게 이유다. 이와는 다른 주장도 있었다. 어떻게든 돈은 돌게 돼 있고, 접대나 선물 등에 쓰여졌던 돈이 보다 생산적이고 필요한 곳에 투자될 수 있을 것이라는 긍정적인 전망도 나왔다. 나아가 OECD 부패지수 최하위인 우리나라가 김영란법으로 새로운 경제 성장 효과를 만들어 낼 것이라는 부푼 기대감도 있었다.

    그런데 참 쓸쓸하게 됐다. 또 속절없이 당했다. 나라를 쑥대밭으로 만들어 놓은 최순실을 털다 보니 국민들에게 ‘시킨대로 말 잘들어라’ 하던 사람들, 정작 자기들은 전혀 다른 세상에서 살고 있었다. 전화 한 통에 수십 수백억원이 오가고, 돈 되고 폼 나는 일 싹쓸이하고, 세금이 자기들 곳간인 양 멋대로 빼 쓰고, 멀쩡한 회사 덮쳐 먹고, 보기 싫은 사람 제치고, 학교 정도는 맘대로 조물락거리고, 가는 세월이 아쉬워 온갖 불·편법으로 의료 처방 받고, 그렇게들 질펀하게 흥청망청 지내고 있었다.

    옛날 윗분들은 나라에 재난이 닥치거나 백성들의 삶이 팍팍해지면 스스로가 몸을 사렸다. 대궐에서는 수라상이 검소해지고, 양반집들도 기름진 냄새를 담 밖으로 내보지 않았다고 한다. 참을성 없는 양반네들이 오죽했으면 없는 제사를 만들어 ‘헛제삿밥’으로 영양보충을 했겠는가. 염치(廉恥)인지 눈치인지 모르겠지만, 그땐 그래도 최소한의 애민(愛民)과 양심은 있었다. 최순실 무리들은 털도 안 뽑고 먹다가 걸린 꼴이다. 법(法) 이전에 몰염치의 극치다. 하기야 구름 위를 거닐었으니 눈치 따위는 아예 염두에 없었다. 시간이 지날수록 드러나는 윗분들의 민낯이 점입가경이다. 국민들만 ‘새’가 된 기분을 떨칠 수가 없다. 누구의 말처럼 정말 이러려고 법을 만들고, 따르라 했을까. 밝고 아름다운 사회로 나아갈 수 있는 좋은 기회였는데 그저 안타까울 뿐이다.

    이 문 재

    사회2부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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