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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살롱] 일상탐독 (23) 박재삼/아득하면 되리라

  • 기사입력 : 2016-11-29 16:23: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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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광장으로 나갔다.
    곧 닥쳐올 겨울을 알리는 가을비가 내린 저녁이었다.
    다음날 주최 측은 1만, 경찰은 4000이라는 집계를 내놨다.
    그 숫자엔 분명 내 머리통 하나도 포함되었을 것이다.
    눅눅한 땅 위에 종이를 깔고 앉았다. 구호도 외쳤다.


    그를 만난 날은 2년 전 2월이다.
    정확하게는 2014년 2월 28일.
    지난 신문을 뒤져보고 알았다.
    역시나 아침부터 비가 추적추적 온 날이었는데, 앙상한 나무가 일렬로 늘어선 아파트 단지에 들어서서
    사진기자 선배와 앞서거니 뒤서거니 그의 아파트로 올라간 기억이 선연히 남아있다.
    나는 사회부 기자였고, 다가올 3월을 앞두고 95번째 3·1절을 기념할 만한 기획기사를 내놔야했다.
    보훈청 자료를 통해 그를 알았다.
    그는 당시 도내에 생존해 있는 애국지사 3명 중 한 명이었다.
    점잖은 노인이 전화를 받았고, 수화기 너머에서 ’모일 모시에 모처로 오십시오.’라는 정중한 목소리가 들렸다.


    어두웠다.
    어둠 속에서, 다들 화가 나 있었고 할 말도 많아 보였다.
    앞에 앉아 있던 초로의 노인은 손녀와 화상통화를 하며 ’할아버지 촛불집회 나왔다’고 자랑을 했고
    옆의 젊은 엄마는 초를 쥐고 깔깔대는 아이에게 ’이 촛불은 불장난에 쓰이는 것이 아니다’라는 엄중한 경고를 했다.
    교복 위에 패딩을 껴입고 삼삼오오 모인 학생들은 ’하야’와 ’퇴진’이라는, 어마어마한 규모의 언어들을 거침없이 쏟아냈다.
    모양은 제각각이었으나, 거기엔 어떤 거대하고도 통일적인 힘이 있었다. 유동적인 에너지가 있었다.
    가만히 앉아 그런 것들을 느끼는 일.
    그것 또한 내가 할 일이었다.


    17살, 그는 진주공립중학교 4학년에 재학 중이었다.
    친구들과 광명회(光明會)라는 서클을 조직했다.
    역사를 공부하고 한글을 썼다. 매월 강요당하던 신사참배를 거부했다.
    학교를 졸업한 뒤에는 대한민국 임시정부에 들어가 독립운동을 하겠다는 꿈도 꿨다.
    그러나 청운의 꿈도 잠시.
    1944년, 대동아전쟁에서 패색이 짙어진 일본의 폭압은 더욱 극악해졌다.
    더이상 학교를 다닐 수 없었다.
    그는 진주지역 동급생 300명과 함께 강제노역에 차출되었고,
    경화동 진해비행장(鎭海飛行場) 건설공사에 투입돼 중노동을 하며 세월을 보내야 했다.
    그러던 어느 날, 느닷없이 총칼을 찬 헌병대가 그를 찾아왔다.


    함안에서 온 고등학교 1학년 남학생이 발언을 시작했다.
    단 한 사람에 의해 움직인 사람이, 5000만 국민에 의해서는 움직이지 않았다는 기록을 역사에 남길 것이냐?
    마산에서 온 고3 남학생이 차분한 목소리로 말했다.
    공부를 하면서도 언론 보도를 보고 한숨이 절로 나오고 답답했다. 수능이 끝이 났으니 뜻을 같이 함께 하고 싶어 용기를 내 이 자리에 나왔다.
    진주에서 온 고3 여학생은 조금은 울먹이는 목소리로 말했다.
    너네 부모를 원망하라던 말은 비수였다. 이 모든 게 자신의 잘못인 줄 아는 우리 부모님을 위해서라도 나는 세상을 바꿔야겠다.


    질문은 오직 한 가지.
    독립만세를 불렀는가?
    그는 혼미한 상태에서 ’아니오’라고도 했다가 ’네’라고도 했다.
    어떨 땐 ’네’라고 했다가 ’아니오’라고 번복했다.
    손가락 사이에 막대를 끼워 관절을 으스러뜨리고 몽둥이로 전신을 맞는 고문을 당했다.
    반세기가 지난 2014년에도, 그는 헌병대에 끌려간 정확한 이유를 몰랐다.
    광명회를 조직한 일이 탄로났을 것이라고 짐작하고 있을 뿐이다.
    1944년 11월 2일, 그는 모진 고문 끝에 치안유지법 위반 혐의로 부산형무소로 이감됐다.


    그해 3·1절 기획기사는 잘 마무리됐다.
    나는 그의 이야기를 받아썼고, 살며시 미소짓는 그의 얼굴 사진도 다음날 지면에 함께 나갔다.
    그러나 그게 다였다. 그동안 나는 그를 잊었다.
    그도 나를 잊고 살았을 것이다.
    그리고 몇 주 전, 나는 그를 다시금 신문에서 볼 수 있었다.
    ’진주시 신안동 자택에서 별세. 향년 88세. 발인은 11일 오전 8시. 국립 대전현충원 애국지사 묘역에 안치될 예정.’
    며칠 뒤 주말, 분노를 품은 엄청난 인파가 촛불을 들고 바깥으로 뛰쳐나갔다.


    이듬해인 1945년 8월 15일, 대한민국은 광복을 맞았다.
    형무소에서 풀려난 그는 30여 년간 교직에 몸 담았고 슬하에 5남1녀를 두어 아버지로서 가장으로서 또 교육자로서 평범한 삶을 살았다.
    2010년, 정부는 그의 공로를 인정해 대통령 표창을 수여했다.
    그러니까 그가 ’애국지사’라는 별칭을 얻은 건 그의 삶이 끝나갈 무렵의 고작 몇 년이었다.
    인터뷰를 시작하기 전, 그는 나와 사진기자에게 ’잠깐만 기다리라’고 했다.
    그는 안방으로 들어갔다.
    그는 장롱에서 양복 재킷을 꺼내어 걸치고 거울을 들여다보며 희끗한 머리칼을 정성스레 매만지고 나왔다.
    이상하게도 그가 했던 말들은 거의 다 잊었는데, 그가 단장을 하던 모습은 쉽게 잊혀지지 않았다.


    나는 빗물에 엉덩이가 축축해져 오는 것을 느끼며 좌우로 흔들리는 촛불을 들고 있었다.
    그리고 거리에 대해 생각하기 시작했다.
    나를 둘러싼 일군의 사람들과 나 사이에 놓인 거리.
    그들이 지나온 날과 지나갈 날들, 내가 지나온 날과 앞으로 닥쳐올 날들의 거리.
    그건 대체 무엇으로 잴 수 있을까?
    무엇을 잣대로 삼아 짐작이나 할 수 있을까?


    나는 1980년대 중반 생.
    진짜 고생스런 삶을 모른다.
    그러나 얼마쯤은 고생스러웠던 것도 사실이다.
    물질이 사랑마저 움직이고, 외양이 본질을 호도하는 이 험한 세상에서
    보통의 삶을 사는 인간으로 살아남기 위해 나름대로 고군분투해왔다.


    ’조국독립’을 외친 10대 소년과 ’하야’를 외치는 10대 소년 사이에 내가 있다.
    내가 지나온 10대는 ’조국독립’과는 너무나 멀고 ’하야’와도 그리 가깝지 않아 보인다.
    나의 외침은 나 개인을 위협하는 것들을 한데 싸잡아 적대시하는 것에 집요했을 뿐,
    다르게 쓰인 적이 없었다.
    그 간극을 매일매일 확인하는 2016년 11월,
    그 거리는 내게 너무 아득하고 아득하다.

    메인이미지

    ’해와 달, 별까지의
    거리 말인가
    어쩌겠나 그냥 그 아득하면 되리라

    사랑하는 사람과
    나의 거리도
    자로 재지 못할 바엔
    이 또한 아득하면 되리라

    이것들이 다시
    냉수 사발 안에 떠서
    어른어른 비쳐오는
    그 이상을 나는 볼 수가 없어라

    그리고 나는 이 냉수를
    시방 갈증 때문에
    마실밖에는 다른 작정은 없어라’

    -박재삼/아득하면 되리라


    김유경 기자 bora@knnews.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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