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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년 04월 21일 (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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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을 보며] 한국 민주주의의 여정- 서영훈(부국장대우 문화체육부장)

  • 기사입력 : 2016-12-08 07: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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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한 원로 학자는 언론과의 인터뷰에서 “‘광장’은 기본적으로 충동의 민주주의일 수밖에 없다”고 했다. 그는 지식사회학자 카를 만하임의 분석을 빌어, 민주주의에는 이성의 민주주의와 충동의 민주주의가 있다고 하면서, 이제부터는 이성의 민주주의가 작동해야 할 때라고 했다.

    광장의 촛불은 충동의 산물일까. 이분의 현실 진단에 딴죽을 걸 만한 깜냥은 내게 부족하겠지만, 적지 않은 이들이 이분과 같은 생각을 갖고 있거나 동조할 수 있겠다고 생각하니 오기가 스멀스멀 기어오른다.

    민주주의의 정의는 간결하다. 헌법 제1조 2항 ‘대한민국의 주권은 국민에게 있고, 모든 권력은 국민으로부터 나온다’,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다.

    민주주의에 굳이 갈래를 짓는다면, 국민이 광화문 광장 같은 곳에 모여서는 ‘이게 좋으냐’ ‘저게 좋으냐’ 하며 토론한 뒤 다수결에 따라 무엇을 결정하면 직접민주주의고, 많은 사람들이 모여 이런 결정을 하는 것은 비현실적이므로 국회의원과 같은 대표자를 뽑아 결정권한을 맡긴 것이 대의제 민주주의다.

    이런 민주주의 앞에 ‘이성의’ ‘충동의’ 등의 수식어는 거추장스러울 뿐이다. 자칫 특정한 시점에 집단적으로 이뤄지는 국민의 행위를 폄훼하는 데 악용될 여지만 줄 뿐이다.

    100만, 200만 명이 광장에 모이는 데 ‘충동’이 작용하지 않았다고 할 수는 없지만, 친구 따라 서울 광화문 광장에, 창원시청 앞 광장에 모인 것이 ‘광장 촛불’의 실체라고 하는 것은 이성적으로 내린 현실진단이라 생각되지 않는다.

    권력을 쥐더니 국민의 말은 도무지 들으려 하지 않고, 국민으로부터 위임받은 막중한 주권을 아무에게나 줘 버리고, 국민 수백 명의 생명이 경각에 달렸을 때 어디에서 무엇을 했는지조차 밝히지 못하는 그런 권력자에 대한 분노가 광장의 촛불을 밝히는 동력이다.

    주권자인 국민은, 권력자와 권력에 기생하는 이들에 의해 주권이 유린되고 나라의 기강이 송두리째 무너져 내리는 것을 목도하면서 그 분노를 터트릴 기회를 기다리고 있었을 뿐이다. 광장은 그런 분노를 발산하고 주권을 발현하는 장소이다.

    민주주의 경험이 일천한 한국사회에서 광장은 특별한 의미를 갖는다. 3·15와 4·19, 5·18, 6·10항쟁을 거치면서, 국민은 광장에 모여 한국의 민주주의를 한 단계씩 발전시켜 왔다. 그런 과정을 거치면서 주권자는 바로 국민이라는 것을 차츰차츰 체화했다. 군사정권 등에 의해 민주주의가 일시적으로 퇴보하는 시기도 있었지만, 그럴 때마다 국민은 광장에 모여들어 비뚤어진 물줄기를 바로잡아 왔다.

    촛불집회의 결과가 어떤 형식으로 나타날지 속단하기 어렵다. 그러나 그 결과가 어떠한 형식이 되든 매듭지어질 것이고, 거리에 나섰던 시민들은 다시 일상으로 돌아갈 것이다. 몇년 뒤, 몇십년 뒤, 다시 거리에 촛불이 넘실댈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그때의 촛불은 지금과는 또 다른 위상을 갖게 될 것이다. 시간이 제자리에 가만히 있지 않는 것처럼, 시민들의 의식도 그 자리에 머물지 않을 것이기 때문이다. 그렇게 한국의 민주주의는, 비록 더디게 느껴질지라도 한 발짝씩 앞으로 나아가고 있다.

    “이성의 민주주의가 작동할 때”라고 했던 원로는 “성공한 민주제는 로마처럼 하루아침에 이루어지지 않는다”고 했다. 맞는 말씀이다.

    서영훈 (부국장대우 문화체육부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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