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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년 03월 29일 (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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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춘추칼럼] 혐오와 농단- 신형철(문학평론가)

  • 기사입력 : 2016-12-16 07: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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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올해의 단어’를 꼽으라면 가장 강력한 두 후보가 바로 ‘미소지니 (misogyny, 여성혐오)’와 ‘국정농단(國政壟斷)’일 것이다. 물론 신조어는 아니어서 그간 사용하는 사람이 없지는 않았지만, 대체로 학계 내부에서 사용되거나 신문 기사 등에서나 볼 수 있는 말이었다고 해야 맞을 것이다.

    그러나 2016년에는 한국어 사용자 모두에게 널리 받아들여지기에 이르렀으니 올해의 단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이처럼 하나의 언어공동체가 새로운 개념을 받아들이는 일이 갖는 의미는 크다.

    앞에서 일단 ‘미소지니’라고 먼저 쓰고 ‘여성혐오’를 괄호 안에 넣은 것은 이 번역어 자체가 최선은 아니라는 의견도 있어서다. “근대에 이르러 헤아릴 수 없이 복잡하고도 정교한 방식으로 여성이 배치된 원리 그 자체를 가리키는 미소지니의 구조적 측면이 이 용어 ‘여성혐오’에서는 잘 드러나지 않는다.”(김신현경) 핵심은 ‘구조적 혐오’에 있는데 그보다 ‘개인적 혐오’의 층위를 먼저 떠올리게 만든다는 단점이 있다는 것. 그래서 남성들로 하여금 ‘나는 여성을 혐오하지 않는다’라는 개인적 층위의 반론을 제기하게 만드는 면도 있다는 것. 일각에서는 말을 어떻게 바꿔도 이해할 사람은 하고 안 할 사람은 안 할 것이라는 회의론도 있지만 말이다.

    딴에는, 이참에 ‘혐오’라는 말 자체의 근본적 의미를, 이를테면 애초 ‘혐오’라는 감정 자체가 전적으로 자발적인 것만은 아니라 ‘구조’에 의해 습득된 것일 수 있다는 가능성을 새롭게 성찰해 보기 위해서라도, 번역어를 교체하지 말고 그냥 두는 것이 낫겠다는 생각도 해보게 된다.

    번역어에 대한 논란이 계속되는 것이 이 사안에 대한 관심을 지속시키기 위해서도 나쁠 것 없다는 뜻이기도 하다. 내가 속해 있는 세대의 남성들에게 페미니즘은 낯선 담론이 아니지만, 언젠가부터 관심과 긴장의 끈을 놓고 살아왔다는 반성을 시작한 남성들이 많아 보이며, 부끄럽지만 나도 거기에 속한다.

    한편 ‘국정농단’에서 ‘농단’이라는 말이 짐작과는 달리 ‘희롱’이 아니라 다른 뜻을 갖고 있다는 것을 알게 된 것도 나로서는 올해의 일이다.

    인터넷에서 쉽게 찾아볼 수 있는 사전에는 그 뜻이 이렇게 요약돼 있다. “깎아 세운 듯이 높이 솟은 언덕. 홀로 우뚝한 곳을 차지한다, 가장 유리한 위치에서 이익과 권력을 독차지한다, 라는 말.” 유래는 ‘맹자’에 있다. 한 상인이 있어 가장 높은 곳(‘농단’)에 올라가 시장의 구조를 파악한 뒤 어떻게 해야 큰 이익을 얻을 수 있을지 저울질했다고 하는데, 사람들이 그 얄미운 상인에게 세금을 물리기 시작한 데서 ‘농단’이라는 말이 부정적인 의미로 사용되기 시작했다는 것이다.

    이번 사안의 핵심은 대통령과 그 비선 측근이 대한민국의 최정상에서 그들의 이익을 저울질하느라 국정을 망가뜨렸다는 점에 있으니, ‘게이트’보다는 ‘농단’이 더 정곡을 찌르는 말이라고 할 수 있겠다. 그들뿐이겠는가. 최정상 농단을 차지한 이들만큼은 아니더라도, 그 부근 어디쯤에서 특혜를 누려온 이들이 적지 않을 것이다. 흥미로운 것은 대다수의 당사자들에게 부끄러움이 감지되지 않는다는 것이다. 모든 것들이 ‘선택받은 소수’인 자신들에게 따르는 당연한 보상이라 생각했던 것처럼 보인다. 그들이 타고난 악당이라고 생각하지 않는다. 반복되는 혜택 앞에서 서서히 자기 성찰 능력을 잃어버릴 수 있다는 점에 대해서라면 나도 예외가 아닐 것이다.

    ‘혐오’에 대해서나 ‘농단’에 대해서나 내가 이야기의 끝에 자꾸 ‘나’를 주어로 삼은 문장을 써보고는 하는 것은 의례적인 반성적 제스처를 집어넣어서 스스로 면죄부를 발송·수신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나 자신에 대한 경계를 늦추지 않기 위해서다.

    신형철 (문학평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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