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바일  |   유튜브  |   facebook  |   newsstand  |   지면보기   |  
2024년 04월 26일 (금)
전체메뉴

[춘추칼럼] 가벼움의 미학- 박형주(국가수리과학연구소장, 아주대 석좌교수)

  • 기사입력 : 2016-12-23 07:00:00
  •   
  • 메인이미지

    처음 유학을 갔더니 영어가 제대로 들리지 않았다. 비속어를 도통 모르는 탓이라 지레짐작하고 공부를 하려고 이 분야의 강자라는 에디 머피의 스탠딩 코미디 비디오를 빌려다 여러 번 들었다. 인종비하에서 여성비하까지, 난무하는 온갖 금기어는 심약한 청년에겐 가히 문화적 충격이었다. 이런 발칙한 비디오를 파는 나라에서 소수인종의 대학입학 비율을 정한 ‘입학 쿼터제’가 비하적 표현이라며 난리더니 긍정행동(affirmative action) 정책이라는 난해한 표현으로 정리되는 건 또 뭔지.

    미국에서 표현의 자유라는 가치가 항상 지금 같진 않았다. 매카시즘의 출현이 한고비였는데, 1950년부터 6년간 지속한 2차 적색공포 시기에 상원의원 조지프 매카시(J. McCarthy)에 의해 주도됐다. 정치인뿐 아니라 할리우드 블랙리스트에 등재된 연예인 다수도 핍박받았고, 과학자도 광풍을 피해 가지 못했다. 제2차 세계대전에서 대량살상무기의 파괴성을 절감하고 반전 평화운동에 나섰던 아인슈타인이나 오펜하이머가 그랬다. 맨해튼 프로젝트의 리더로 원자폭탄을 탄생시킨 오펜하이머는 1954년에 한 달 동안 상원 청문회에 불려가 고초를 겪었다. 중국의 핵과 미사일 개발을 주도한 과학자 첸쉐썬(錢學森)은 매카시즘의 감시와 통제를 못 견디고 미국에서 중국으로 돌아간 탓에, 매카시즘이 중국에 보낸 최대의 선물이라고 한다. 저명한 수학자 스테판 스메일은 베트남 전쟁을 반대하며 반전운동과 표현의 자유를 옹호하는 활동을 한 덕분에 한때는 미국을 피해서 브라질의 순수응용수학연구소(IMPA)에서 연구활동을 했다. 1966년 모스크바 세계수학자대회에서 필즈상 강연을 하면서는 소련 정부의 인권탄압을 비판하는 바람에 구금돼 외교 문제로 비화하기까지 했다. 표현의 자유는 미국만의 문제가 아니었다. 1970년 노벨문학상을 받은 소설가 솔제니친은 대학에서 수학을 전공했고 아내는 수학자였다. 스탈린을 비난하는 개인 서신이 문제가 돼서 11년간 투옥과 유배 생활을 했다. 이 경험을 쓴 작품으로 노벨상을 받았으니 스탈린이 문학에 보낸 최대의 선물이려나.

    캐나다에서 활동하던 세계적인 한국인 수학자 이림학 교수는 반독재 활동 탓으로 수십 년간 고국 방문이 불가능했다. 이제 대한민국 과학기술 명예의 전당에 헌정된 유일한 수학자가 됐으니 상전벽해다. 순탄치 않은 과정을 거쳐 지금 수준의 표현의 자유에 다다른 우리나라에서는 최근엔 문화적으로 후퇴의 조짐도 있다. 많은 이들이 특정 계층이나 집단에 대한 비판을 못 견뎌 하고 풍자와 해학에 관대하지 않다.

    얼마 전 대학 강의에서 4대강 찬성 주장으로 문제가 된 일이 있었다. 청중의 분노를 이해하지만, 전혀 다른 견해를 가진 사람이 논쟁과 공론화를 통해 자신의 주장에 책임지게 하는 것으론 부족할까? 미국에서도 반전 활동으로 고초를 겪은 오펜하이머의 대척점에 맨해튼 프로젝트의 다른 멤버인 폰 노이만이 있었다. 수백만의 유태인이 죽어가는 것을 목격하고 나치의 박해를 피해 미국으로 온 그는 평화유지와 전쟁억지를 위해 수소폭탄 개발에서도 주요 역할을 맡았다. 수학과 컴퓨터 개발의 천재적 재능으로 핵분열과 핵융합 모두를 무기로 구현했으니, 반전주의자들에겐 불가사의한 존재였을 것이다. 시대에 따라 정의의 개념조차도 상대적일 수 있지만 자신의 생각을 공포감 없이 얘기할 수 있는 권리는 좀 더 보편적인 가치가 아닌가. 유머러스함은 소중한 가치 아니던가. 엄중한 시절이지만, 그럴수록 조금 가벼워지면 어떨까.

    박형주 (국가수리과학연구소장아주대 석좌교수)

  • < 경남신문의 콘텐츠는 저작권법의 보호를 받는 바, 무단전재·크롤링·복사·재배포를 금합니다. >
  • 페이스북 트위터 구글플러스 카카오스토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