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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년 04월 20일 (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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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7 경남신문 신춘문예 '소설' 당선작] 블랙스팟- 김서연

  • 기사입력 : 2017-01-02 07: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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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블랙스팟- 김서연


    어젯밤, 그가 정신을 잃던 순간 나는 119에 전화를 걸고 그의 집을 도망쳐 나왔다. 아파트 화단 펜스 뒤에서 구급대원들이 그를 실어 나르는 걸 지켜보았다. 다행히 그는 그들과 말을 주고받을 만큼 의식이 돌아와 있었다. 새벽녘쯤 병원에 간 그로부터 문자메시지가 날아왔다. 경미한 부상이니 걱정 말라는 말과 함께 아침에 그의 집에서 만나자는 내용이었다. 경과를 지켜봐야 하므로 아침에나 집에 갈 수 있다는 거였다.

    그래서 그의 집 앞에 오긴 했는데 막상 들어갈 엄두가 나지 않았다. 그의 얼굴을 다시 볼 용기가 없었다. 책임을 물라면 얼마든 용의는 있었다. 두려움의 무게를 재는 저울이 있다면 기준치를 훌쩍 넘어섰을 터였다. 더 소심해지기 전에 나는 저울에서 훌쩍 뛰어내려 그의 집을 들어섰다

    집안은 어젯밤 그대로였다. 그는 아직 돌아오지 않았다. 나는 거실을 가로질러 욕실로 들어섰다. 긴 머리를 하나로 질끈 묶은 내가 거울 속에 있었다. 퀭한 눈에 짙은 다크서클. 밤새 못 잔 티가 역력했다. 세면대 위에 나란히 놓인 칫솔 두 개가 보였다. 빨간색이 내 것이고, 초록색이 그의 것이었다. 손잡이가 말짱한 쪽이 초록색이었다. 나는 빨간 칫솔을 집어 휴지통 속에 던졌다.

    칫솔은 그가 야심차게 준비한 커플목록 중 하나였다. 그는 칫솔뿐 아니라 슬리퍼, 티셔츠, 쿠션, 심지어 모기퇴치세트까지 커플용을 고집했다. 나이 마흔에 그럴 수 있다니. 똑같은 티셔츠를 입고 멋쩍어하던 건 오히려 내 쪽이었다. 문제는 칫솔이었다. 시중에 판매되는 칫솔 대부분이 파랑과 빨강 계열로 구분을 짓는다는 점이었다. 나는 빨간 칫솔 손잡이에 조그맣게 잇자국을 남겨두었다. 사물에 표식을 남기는 건 나의 오랜 습관이기도 했는데 시작은 초등학교 3학년 때쯤이었을 것이다.

    그날은 전교생 신체검사가 있는 날이었다. 아이들은 한 줄로 늘어서서 차례를 기다렸고 드디어 나의 차례가 돌아왔다. 담임선생은 손바닥만 한 책을 눈앞에 펼치더니 무슨 숫자가 보이느냐고 물었다. 책에는 조잡한 색깔의 점들이 어지럽게 섞여 있었는데 나는 그게 밤하늘에 쏘아올린 불꽃처럼 반짝인다고 생각했다. 금방이라도 화려한 불꽃들이 책을 뚫고 나올 것만 같았다. 숫자 같은 것은 보이지 않았기 때문에 당연히 고개를 저었다. 담임은 그런 나를 빤히 쳐다보며 물었다.

    “정말 여기 적힌 숫자가 안 보이니?”

    나는 잘못한 사람처럼 고개를 수그렸다. 아이들이 내 주위로 몰려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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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얘, 말해봐. 안 보이냐고 이게?”

    담임의 집요한 물음이 이어질 때마다 얼굴이 뜨겁게 달아올랐다. 아이들이 웅성거렸고, 나는 결국 울음을 터뜨렸다. 다음날 누군가 내 체육복 등판에 삐꾸, 라고 낙서질을 해놓았다. 어감만으로도 나쁜 말이라는 걸 알 수 있었다. 아이들은 말의 의미도 모른 채 덩달아 나를 삐꾸라고 놀렸다. 한동안 이름보다 그렇게 불렸다. 그 소리가 듣기 싫어서 빨간색이 칠해진 교과서나 학용품에 남몰래 흠을 내놓기 시작했다.

    욕실을 나오면서 집안을 둘러보았다. 세 평 남짓한 거실에는 커다란 책장이 마주보고 서 있었고 양쪽 모두 책들로 빽빽했다. 약학 서적에서부터 각종 인문서, 경영서, 자기 계발서……. 책들은 종류별로 분류되었다. 그것은 다시 책의 크기라든지 발행연도, 저자 순으로 나뉘었다.

    그는 그 많은 책의 위치를 모두 기억해냈다. 책을 꺼내 읽고 아무데나 꽂아두면 귀신같이 집어내곤 했다. 한 번은 양쪽 책장에 책들을 일부러 바꿔놓아 보기도 했는데 며칠 뒤 어김없이 본래의 자리로 돌아와 있었다. 빈틈없고 꼼꼼한 데다 똑똑하기까지 한 그가 나를 왜 만나는지 가끔 의문이 들었다.

    약국에서 처음 봤을 때도 그는 책을 읽느라 인기척을 듣지 못했다. 아주머니 하나가 들어와서는 총각 선생, 하고 부르자 그때서야 책을 덮고 일어섰다. 숱 없는 곱슬머리에 넓은 이마, 적당히 여윈 얼굴에 짙은 뿔테 안경. 조금은 깐깐해 보이는 인상이었다. 껌 한 통만한 타이레놀을 사면서 약의 효능, 사용용법, 주의사항까지 듣긴 처음이었다. 이튿날 퇴근길에 약국 앞에서 걸음이 멈춰졌다. 먼지 한 점 없이 잘 닦인 유리문이었다. 여전히 책에 심취한 그가 유리 너머로 보였다. 종일 쇼핑몰 안내데스크를 지키는 나처럼 그도 답답하고 좁은 유리문 안에 갇혀 있는 기분일까? 그런 생각을 하고 있을 때쯤, 그가 갑자기 고개를 들었다. 그대로 발길을 돌리면 뭔가를 들킨 상황이 되고 말아서, 나는 처음부터 그럴 작정이었다는 듯 유리문을 밀고 안으로 들어갔다.

    진열대 앞쪽에 세워진 염색약들이 가장 먼저 눈에 들어왔다. 대부분 ‘새치머리용’이라고 쓰여 있었다.

    “다른 색상은 없나요?”

    내가 묻자, 그가 안쪽에서 염색약 세 박스를 꺼내 와 진열대 위에 늘어놓았다. 풍성한 웨이브 머리를 늘어뜨린 여성모델의 얼굴이 박스마다 똑같이 그려져 있었다.

    “이건 모두 검정이네요.”

    그가 나를 잠깐 바라봤던 것 같다. 그는 곧 박스를 하나씩 손으로 가리키며 말했다.

    “이건 와인 빛이 도는 레드 계열, 이건 카키, 이건 밝은 갈색 계열입니다. 젊은 여성분들이 선호하는 색들이죠.”

    나는 그때서야 내가 여배우의 머리색을 읽지 못했다는 걸 알았다. 그는 내 선택을 기다린다는 듯 내 눈을 가만히 응시했다.

    “이걸로 할게요.”

    나는 밝은 갈색 상자를 집어 든 뒤 서둘러 계산을 마치고 약국을 나왔다. 나와서 보니 상자를 쥔 손이 축축했다.

    얼마 뒤 압박붕대를 새로 사기 위해 약국에 들렀다. 하루 종일 안내데스크 앞에 서 있으면 퉁퉁 붓는 다리 때문에 압박붕대로 다리를 감고 자는 습관이 있었다.

    “머리색이 잘 어울리십니다.”

    “네?”

    나는 조금 뒤에야 그의 말을 알아들었다. 그리곤 그가 나를 기억하고 있다는 사실에 얼굴이 붉어졌다. 그가 내준 붕대를 바닥에 떨어뜨렸다. 떨어진 붕대를 주우려다 다시 떨어뜨렸다.

    “잠깐만요.”

    그가 내 눈을 지그시 보며 말했다.

    “나를 따라 해봐요.”

    나는 그가 하는 대로 천천히 호흡을 들이마셨다가 내쉬었다. 간단한 심호흡이었는데 훨씬 안정이 되었다. 그는 아무것도 묻지 않았다. 대신 타이레놀을 사던 날처럼 압박붕대를 오래 사용하면 다리 색이 변하거나 피부가 딱딱해질 수 있다는 주의사항을 일러주었다. 만 명 중 하나가 걸릴지 모를 부작용이라면서.

    그때부터 자주 그의 약국을 드나들었다. 편의점에서 파는 웬만한 물건들은 약국에서도 팔았다. 나는 그의 설명들을 듣는 게 좋았다. 그도 그런 나의 태도가 싫지 않은 것 같았다. 약국에서 이런저런 얘기들을 나누다 저녁시간을 보낸 적도 있었다. 그러다 함께 밥을 먹고, 영화를 볼 만큼 친해졌다. 가끔 펍에서 맥주도 마셨다. 어느 날 맥주를 마시고 나서 그가 어색하게 첫 키스를 시도한 뒤로는 그의 집을 드나들며 그가 만든 요리를 먹고 그의 침대에서 밤을 보내기 시작했다. 그렇게 그와 거짓말처럼 연인이 되긴 했는데, 딱 거기까지라는 생각이 들었다.

    나는 그의 사적인 부분에 대해서는 아는 게 없었다. 부모가 어떤 사람들인지, 형이나 아우는 있는지. 누나나 여동생은. 그도 저도 아니면 나처럼 형제 없이 혼자 자란 아이인지, 그가 나를 궁금해 하지 않았기 때문에 내 쪽에서 먼저 묻기가 어려웠다.

    그는 여간해서 감정을 드러내지도 않았다. 심지어 공포, 멜로, 코미디 어떤 장르의 영화를 봐도 표정에 동요가 없었다. 사정을 할 때조차 마찬가지였다. 미끄러지듯 내 위에서 내려오면 끝난 거구나, 였다. 그때마다 할리우드 영화의 한 장면이 떠올랐다. 정체불명의 물질이 인간의 뇌에 침투해 감정을 없애버리는 내용의 영화였다. 침입자들의 표적이 되지 않으려면 감정을 숨겨야만 했다. 감정을 들키지 않기 위해 시체처럼 걸어 다니던 사람들 속에서 그를 본 것만 같았다. 그들과 다른 게 있다면 무슨 일이 있어도 양말만큼은 꼭 신는다는 거였다.

    그는 땀이 찔찔 나는 한여름에도 양말을 벗지 않았다. 잘 때는 물론 섹스 할 때도 양말만큼은 고수했다. 만난 지 삼 개월쯤 돼서 그가 입을 열었다.

    “발을 보온시켜서 기를 순환시키는 일종의 단전호흡이지.”

    그러고 보니 ‘기공 수련’이라고 쓰인 포스트잇을 냉장고 문에서 본 것도 같았다.

    그는 포스트잇에 계획을 적어 냉장고 문짝에 붙여두는 걸 좋아했다. 공간이 너른 벽은 실행하지 못할 계획들을 무분별하게 늘어놓게 된다고 했다. 실제로 그는 자신이 적어놓은 계획들을 반드시 실행에 옮겼다. 그래선지 알몸에 양말만 신은 그가 그닥 이상해보이지도 않았다. 적어도 그 일이 있기 전까지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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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그러니까 내가 그의 입에서 기공 수련이라는 얘기를 듣고 나서 얼마 후에 일이었다. 막 그의 집에서 저녁을 먹고 나오던 길이었다. 한참을 걷다가 휴대폰을 두고 온 게 생각났다. 되돌아가 벨을 눌렀는데 기척이 없었다. 그가 가르쳐준 도어록 비번을 누르고 안으로 들어갔다.

    샤워를 끝낸 그가 알몸으로 욕실에서 나오다 나를 보곤 소스라치게 놀랐다. 침입자라도 본 얼굴이었다. 그의 맨발이 제일 먼저 눈에 들어왔다. 자라다 만 듯 기형적으로 짤막한 발가락들이.

    “어…… 무슨 일이야?”

    그는 수건을 발쪽으로 늘어뜨리며 더듬거렸다. 일은 내가 아니라 그에게 있어 보였다. 나보다 열 살이나 더 먹은 그가 친구처럼 느껴지긴 처음이었다. 나는 휴대폰을 집어 그의 눈앞에서 흔들었다.

    “덤벙대긴.”

    달라진 건 없었다. 이후에도 그는 변함없이 내 앞에서 양말만큼은 벗지 않았다.

    빗방울들이 그의 아파트 창을 두드렸다. 베란다 밖을 내다보았다. 조금 전만 해도 투명했던 하늘이 먹구름으로 뒤덮여 있었다. 검게 부푼 구름들이 빗줄기를 쏟아냈다. 갑자기 쏟아지는 걸 보니 소낙비 같았다.

    냉장고에서 물병을 꺼내 병째 마셨다. 찬물이 식도를 타고 흐르자 긴장이 풀렸다. 냉장고 문이 닫히는 것과 동시에 듬성듬성 붙어 있던 포스트잇들이 몸을 들썩거렸다. 얼마 전까지만 해도 냉장고의 여백이 보이지 않을 정도로 촘촘하게 붙어 있던 것들이다. 대부분 나와 관련한 계획들이었다.

    ‘유진과 밥 먹기’, ‘유진과 영화보기’, ‘유진과 자전거 타기’…….

    그는 평일에도 늦게까지 약국 문을 열었다. 주말에도 일요일 하루밖에 쉬지 못했다. 그런 중에도 나를 위해 틈틈이 시간을 내주었다. 대신 그날은 무슨 일이 있어도 밥을 먹고, 영화를 보고, 자전거를 타야 했다. 계획이 어그러졌다면-그는 실행할 수 있는 계획만 세운다고 했으므로-전적으로 날씨 탓이거나, 내 탓인 게 되었다. 바꿔 생각하면 적당히 어물어물 사는 여자 친구를 위해 일과도 정해주고 책임감도 준 셈이었다.

    돌이켜 보면 나는 그 흔한 동호회나 긴밀한 사회적 네트워크 같은 것에도 관심을 가져본 적이 없었다. 일 년에 한두 번 전화를 걸어오는 고교 동창들은 언제나 직장문제 아니면 연애, 결혼과 관련한 이야기뿐이었다. 이야기 말미에는 친절하게도 넌 어때? 하는 물음을 잊지 않았다. 나는 약사인 남자친구가 생겼다고 말했다.

    “악사를 만난다고?”

    친구들은 대부분 그렇게 되물었다.

    “악사가 아니고 약사라니까.”

    막상 그렇게 말하고 나자 그가 악사라도 상관없을 것 같았다.

    회사에서 해고통보를 받던 날에도 나는 순순히 유니폼을 벗고 쇼핑몰 로비를 걸어 나왔다. 건물 벽에는 대자보들이 포스트잇처럼 매달려 있었다. 붉은색 띠를 머리에 두른 동료들이 건물 앞에 모여서 ‘살고 싶어요’, 를 외쳤다. 그들이 보는 시선과 내가 보는 시선은 다른 거라고 생각했다. 그들이 보는 것을 내가 보지 못한다고 해서 내가 틀리다고도 할 수 없었다. 그런데도 나는 그들 속으로 들어갈 용기가 나지 않았다. 언젠간 그들이 나를 알아보고 밀어낼 것이 걱정되었다.

    언젠가 여성잡지에서 우리나라 여성 색각이상자 수가 0.5퍼센트라는 기사를 읽은 적이 있다. 나 같은 사람이 세상에는 생각보다 많이 있었다. 잡지에는 색각이상자들을 위한 교정안경이나 지하철 노선도 같은 것들도 소개했다. 안경을 쓰고 새로운 세상을 보았다는 감동의 사례들까지. 그들은 단지 불편할 뿐, 부끄러운 건 아니라고들 했다. 그들이 착용했다는 안경 값이 비싼 편도 아니었지만 나는 그들처럼 하지 않았다. 눈에 띄는 검은색 교정안경을 돋보기처럼 썼다 벗었다 하며 세상에 나를 드러내고 싶지가 않았다.

    나는 냉장고에 붙은 포스트잇 하나를 눈여겨보았다. 세미나 장소와 시간이 적힌 포스트잇이었다. 그는 이제 세미나에 나가지 않았지만 일정은 변함없이 적어두었다.

    세 달 전부터 그는 매주 두 번씩 약사회에서 주최하는 세미나에 참석했다. 공교롭게도 내가 해고당하던 그 즈음이었다. 강의가 끝나면 그는 수강생들과 밤늦도록 모임을 가졌다. 평일에는 세미나 준비로 바빴기 때문에 거의 매일 만나다시피 했던 우리는 한 달에 서너 번 꼴로 만남이 줄었다. 나는 지루할 정도로 시간적 여유가 있었고, 그는 잠자는 시간도 부족해 보였다. 그가 정말 보고 싶을 땐 약국에 찾아간 적도 있었지만 근처에서 번번이 발길을 돌렸다.

    실직 후, 새 직장을 알아보지 않은 건 아니었다. 서른이 코앞인 고졸 여성을 원하는 회사는 없었다. 쇼핑몰도 마찬가지였다. 안내데스크는 참신하고 발랄한 20대 초반이, 계산대나 판매대는 과외비를 벌려는 아주머니들이 독식했다. 끝까지 저항하던 동료들이 재계약을 하거나 정규직 전환에 성공했다는 소식을 듣던 날, 나도 인근 제과점의 파트타이머 일을 시작했다. 일이 끝나면 집으로 돌아와 방구석에서 텔레비전 리모컨만 눌러댔다. 제과점에서 얻은 빵으로 적당히 끼니를 때웠다. 아침에 눈을 뜨면 일상은 똑같은 벽지의 무늬처럼 펼쳐지다 다음날로 이어지곤 했다. 며칠 동안 그의 전화는 없었다. 안부를 묻는 문자메시지마저 뜸했다. 나는 휴대폰 배터리를 뽑아버렸다. 그가 집에 찾아올 리 없다고 생각한 게 실수였다.

    빵 쪼가리를 우물거리면서 현관문을 열자 그가 서 있었다. 말끔한 슈트차림의 그가. 반사적으로 신발장 거울을 돌아보았다. 후줄근한 추리닝 차림에 부스스한 얼굴. 내가 오히려 십년은 늙어 보였다. 어안렌즈로 미리 확인하지 않은 것이 후회되었다. 빵이 목구멍을 틀어막는 바람에 손바닥으로 가슴을 쳤다.

    “괜찮아?”

    그가 걱정된다는 표정으로 물었다.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내일 저녁에 파트너 동반 모임이 있어. 전화기가 꺼져 있길래.”

    그때서야 휴대폰 배터리를 뽑았던 게 생각났다.

    “밥을 먹지 그래. 다시 연락할게.”

    잠깐의 정적과 함께 문이 닫혔다.

    인사할 타이밍마저 놓쳐버렸다. 하지만 신발장 거울에 비친 내 모습을 다시 보는 순간 그쯤에서 사라져준 그가 고마울 정도였다. 게다가 파트너 동반 모임이라니. 그가 지인을 소개하는 건 처음 있는 일이었다. 그건 나를 여자 친구 이상으로 생각한다는 의미도 된다. 그런 게 아니라면 공식적인 자리에 데려갈 이유가 없었다. 똑같은 무늬의 연속이던 일상 속에서 그날 밤 나는 새로운 무늬를 발견한 것 같았다. 하지만 막상 그를 따라 모임장소에 들어서는 순간 뭉그러진 빵처럼 다시 주눅이 들었다.
     
    고급스러운 한지로 마감된 벽지, 은은한 할로겐 조명을 따라 대형 홀이 펼쳐졌다. 홀을 가로지르자 통유리로 둘러싸인 룸이 보였다. 그런 고급횟집은 처음이었다. 긴 테이블을 마주하고 앉은 여섯 쌍의 남녀가 일제히 우리를, 정확히는 나를 쳐다보았다. 다들 품위 있는 모습이면서도 눈빛만큼은 끈질기게 내 몸을 훑었다. 나는 백조 무리 속에 끼어든 까마귀처럼 쭈뼛거리며 그의 옆에 앉았다.

    오십대로 보이는 커플 한 팀과 나머지는 삼, 사십대로 보이는 커플이었다. 오십대 커플부터 돌아가며 동행을 소개했다. 두 팀을 제외하곤 모두 약사커플이었다. 우리 차례가 되자 그가 내 이름과 나이를 밝혔다. 모두의 입에서 옅은 탄성이 흘러나왔다.

    “어린 여자 친구 만나려면 긴장 좀 해야겠네.”
     
    건너편에 앉은 와이셔츠 차림의 남자가 그와 나의 잔에 맥주를 따라주며 웃었다. 잔을 받은 그는 묵묵히 맥주를 입으로 넘겼다.
     
    “유진씨는 무슨 일을 해요?”
     
    대각선으로 앉은 턱선이 갸름한 여자가 톤이 높은 말투로 물었다. 내가 머뭇거리자 오십대 남자가 말을 이었다.
     
    “하던 얘기나 끝내지. 자네들은 경영에 실패하는 이유를 뭐라고 생각하나?”
     
    “자존심 때문이겠죠.”
     
    그렇게 대답한 사람은 옆에서 줄곧 듣고만 있던 그였다. 그는 말을 멈추지 않았다.
     
    “다들 자존심 때문에 경영학습을 멀리하죠. 저도 그랬고, 아마 여기 계신 선배님들도 그러셨을 거라 생각합니다. 저 같은 경우는 월세도 제때 못 내면서 체면이 중요했으니까요. 세미나를 시작하면서 깨달은 게 많습니다. 우리라고 일등 약국 만들지 말란 법 없잖습니까.”
     
    “저 친구 단단히 작정했군.”
     
    누군가 던진 농담에도 아랑곳없이 그는 약국을 성공적으로 경영하기 위한 전략들을 논리정연하게 설명했다. 그동안 그가 들였을 노력이 짐작되는 입이 벌어질 만한 계획들이었다. 질문과 답변이 이어졌다. 그가 그토록 들떠있는 모습은 처음이었다. 속내를 드러낼 줄도 알았다. 그의 약국 사정이 좋지 않다는 것도 그때서야 알게 되었다. 나만 모르고 있었다. 나만 빼고 모두 알고 있었다. 정작 내가 아는 것은 그가 약사라는 사실과, 그런 그가 현재 나의 연인이라는 것뿐이었다. 나는 유리잔에 든 맥주를 단숨에 마셔버렸다.
     
    그때 유니폼 차림의 종업원이 커다란 접시를 양손에 받쳐 들고 나타났다. 붉은 꽃과 이파리로 장식된 접시 위에 금가루를 얹은 붉은 바닷가재가 누워있었다. 술기운 탓인지 눈앞이 아득해졌다. 껍질을 가르고 살을 발라놨는데도 가재의 아가미가 살아 움직였다. 여러 개의 젓가락들이 가재의 살점을 집어갈 때마다 가재는 커다란 집게를 필사적으로 꼼지락거렸다. 살아있는 가재를 먹다니.
     
    “먹어봐.”
     
    그가 옆에서 팔을 툭 쳤다.
     
    내가 마지못해 젓가락을 들자, 가재가 눈알을 굴려 날 쳐다보았다. 살아있는 가재를 먹는 건 도저히 인간으로서 할 수 있는 짓이 아니었다. 가재는 계속해서 나를 노려봤고 그는 옆에서 나를 채근했다. 먹어봐, 라고.
     
    “살아 있잖아요.”
     
    나는 그렇게 말하곤 숟가락으로 가재머리를 툭, 내리쳤다. 가재는 여전히 집게를 꿈틀거렸다. 숟가락보다 단단한 뭔가가 필요했다. 그때 가재 접시 위에 장식용으로 놓인 납작한 옥돌이 눈에 들어왔다. 돌멩이라면 한방에 기절시킬 수 있었다. 옥돌을 집어 드는 순간, 그가 내 허벅지를 지그시 눌렀다.
     
    잠깐의 침묵. 냉랭한 기운이 주위를 훑고 지나갔다. 고개를 들자 수십 개의 눈이 나를 향해 쏠려 있었다.
     
    그 일이 있고나서부터 그는 모임에 참석하지 않았다. 나 때문일 텐데도, 그는 그런 게 아니라고만 했다. 냉장고에 포스트잇마저 줄기 시작했다. 새로운 계획을 세우지 않아서였다. 여전히 나를 만나주긴 했지만 하나의 일과처럼 보였다.
     
    그럴수록 나는 그의 포스트잇에 주목했다. 새로운 메모가 붙어있지 않으면 불안해졌다. 이따금 새 메모가 올라오긴 했으나 이전에 비해 글씨도 큼직해졌고, 내용도 간략해졌다. 우편, 5시. 책, 전기, 물…… 그런 식이었다. 대부분 단어나 짧은 명사형으로 끝이 났는데 그것들은 혼자만의 암호처럼 보였다. 글자 수가 줄수록 그를 해독할 수 있는 기회도 주는 것 같았다. 그가 남긴 글자들이 나에 대한 사랑의 척도라도 되는 양 마음을 졸였다. 글자 수가 준만큼 그가 내게서 멀어지는 기분이었다.
     
    간혹 그는 안경을 손에 들고 책을 읽기도 했다. 한 번은 벼르고 벼르다 어디가 불편하냐고 물었다. 그가 찡그린 얼굴로 나를 보며 말했다.
     
    “안경도 한 번씩 벗어주는 게 눈 건강에 좋아.”
     
    그의 말보다 그의 찡그린 얼굴이 마음에 남았다. 동요가 없던 그의 표정에서 자주 ‘짜증’이 읽혔다. 그는 나를 옆에 두고 책 읽는 데만 몰두했다. 책을 읽는다기보다 뚫어져라 보는 사람 같았다.
     
    그는 변하고 있었다. 예전에 떠난 남자친구도 그랬다. 서서히 거리를 두다가 어느 날 갑자기 한마디 내뱉곤 돌아섰다.
     
    “널 보면 태엽인형이 생각나. 태엽을 감아줘야만 움직이는 인형 말야. 대체 무슨 생각으로 사냐 넌.”
     
    나는 그게 내게 묻고 싶은 말이었는지, 들려주고 싶은 말이었는지를 알 수 없었다. 분명한 건 남자친구가 내게 왔을 때의 이유와 떠날 때의 이유가 다르지 않았다는 점이었다. 뭐든 고분고분 따라주는 내가 이상형이라고 말했던 사람이었으니까. 학창시절 나의 생활기록부에는 늘 수동적, 자발적 참여 부족 같은 말들이 반복되곤 했다. 수동적으로 중, 고등학교를 다녔고 대학은 자발적 참여 부족으로 가지 못했다.
     
    그래서인지 지금 만나는 그도 저러다 갑자기 내게서 등을 돌릴 것만 같은 예감이 들었다. 그런 생각이 드는 날이면 혼자 무언가를 끄적거리게 되었다. 그가 했던 것처럼 포스트잇에 짧은 일과를 적어 화장대 거울에 붙여두기도 했고, 그것을 실천하기 위해 노력하기 시작했다. 분량을 정해놓고 책을 읽는다든가, 혼자 영화 보기, 옷장 정리 등 구체적인 것들을 적고 실행에 옮겼다. 그러다 보니 언제부턴가 혼자 무언가를 하고 있었고, 다시 무언가를 하고 싶다는 욕구가 생겨났다. 나로서는 첫 번째 ‘자발적 참여’인 셈이었는데 바로 어제 저녁 일도 그래서 벌어지고 말았다.
     
    모처럼 함께 시간을 보내기로 한 그의 집에서 나는 그를 위해 요리를 하겠다고 나섰다. 세미나 사건 이후로 그에게 빚을 지고 있다는 느낌이었고 그것을 만회하고 싶었다. 이전 같으면 직접 만들어야 직성이 풀릴 그였겠지만 어제는 그마저도 귀찮다는 듯 내가 하는 대로 내버려두었다.
     
    내가 주방에서 부산을 떠는 동안 그는 거실 바닥에 앉아서 뜯겨진 책의 낱장을 일일이 접착제로 붙이던 중이었다.
     
    “내구성이 떨어지는 책들을 보면 화가 나.”
     
    그는 나달거리는 책장을 손으로 들추면서 그렇게 중얼거렸다. 그의 손가락 사이에 위태롭게 끼어져 있는 종잇장이 나를 두고 하는 말 같았다. 냄비의 물이 끓어 넘쳤다. 나는 서둘러 뚜껑을 열고 국수를 집어넣다가, 국수를 삶기 전에 고기와 야채부터 볶아야 한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눈과 손이 허둥대기 시작했다. 그때 그가 나를 불렀다.
     
    “저기 말야.”
     
    “배고파요?”
     
    “아니. 식탁 위에 면도기 보이지? 충전됐는지 좀 봐줘.”
     
    일단 가스레인지의 불부터 껐다.
     
    벽 쪽으로 붙여놓은 작은 식탁은 콘센트가 달린 벽면과 맞닿은 곳이어서 그는 매번 그곳에서 면도기나 휴대폰 같은 걸 충전했다. 그런데 콘센트에는 면도기의 플러그만 꽂힌 게 아니었다. 휴대폰도 충전 중이었다. 그의 평소 성격대로 면도기와 휴대폰이 나란히 놓여 있었다. 자로 잰 듯 열에 맞춘 그것들을 보자 갑자기 긴장이 되었다. 면도기와 휴대폰 불빛이 읽히지 않았다. 휴대폰을 손으로 가리고 면도기의 불빛을 뚫어져라 봤지만 어느 쪽이 붉은색인지 알 수 없었다. 그런 상황에서 사실은 내가 색각이상자예요, 라고 밝히기도 난감했다. 왜 하필 지금인가, 그런 원망이 들 뿐이었다.
     
    “충전 됐으면 플러그 좀 빼 줄래.”
     
    그의 말이 끝나기 무섭게 나는 싱크대로 돌아가 손에 잡히는 대로 유리컵 하나를 집어 수돗물에 흔들었다.
     
    “나 손에 물 묻었어. 직접 와서 봐요.”
     
    그가 빤히 쳐다보는 게 느껴졌지만 짐짓 컵을 닦는데 열중한 척했다. 마지못해 일어서는 기척이 났다.
     
    “뭐야, 아직 빨간불이잖아.”
     
    그가 처음으로 화를 냈다. 그의 반응에 유리컵이 손에서 미끄러졌다. 컵이 바닥에 떨어지면서 산산조각으로 부서졌다. 그는 깨진 유리조각들과 나를 번갈아 보더니 말없이 한숨을 내쉬었다. 나를 뒤로 물러서게 하곤 주방용 수건을 손에 들고 부엌바닥에 쭈그려 앉았다. 수건으로 유리조각들을 쓸어 모으던 그가 갑자기 심드렁한 목소리로 말했다.“삐꾸냐, 그걸 못 보게.”
     
    온몸의 신경들이 송곳처럼 솟구쳐 올랐다. 걷잡을 수 없는 떨림이 온몸으로 퍼져나갔다. 나는 손에 잡히는 대로 뭔가를 집어 들었다. 정신을 차렸을 때는 이미 그가 바닥에 깔개처럼 늘어진 뒤였다.
     
    나는 유리잔처럼 그렇게 깨져버리고 말았다. 그와 멀리 떨어져 있다는 생각이 들면 말할 수 없이 슬프곤 했었는데 눈물은 흐르지 않았다. 내게 등을 보인 채 불편하게 눈을 감고 있는 그가 완전하게 멀어 보였다.
     
    어쩌면 의식이 돌아오던 순간, 그는 내게 진심으로 고마워했을지도 모른다. 이별의 빌미를 제공해준 셈이 되었으니. 구급대원들에게 나를 신고하지 않은 것도 서로 덮고 넘어가자는 의미일 수 있었다.
     
    “피차 서로 실수한 것이니 깔끔하게 끝내자.”
     
    아마 그런 얘기들을 통보하기 위해 집으로 오라고 한 것일지도 몰랐다.
     
    부엌은 어제의 일들을 고스란히 기억시켜 주었다. 유리 조각들을 피해 가스레인지 쪽으로 발을 옮겼다. 하얀 국수 가락이 투명냄비로 한가득이었다. 뚜껑을 열면 퉁퉁 불은 국수 가락들이 탄산거품처럼 밀려나올 것만 같았다. 물기가 사라진 채소들이 싱크대 주변에 널려 있었다. 수납장 속에 가지런히 놓인 식기들과 상반된 모습이었다. 반듯하게 정돈된 거실 책장도 대비를 이루긴 마찬가지였다. 빈 구석이라곤 눈곱만큼도 찾을 수 없는, 기계적으로 정렬된 책들. 그의 손길이 닿는 곳이라면 어느 것 하나 허투루 비껴있지 않았다.
     
    창밖에는 여전히 비가 쏟아지고 있었다. 습기를 머금은 바람이 거실창 안으로 몰아쳤다. 창가에 놓인 더피 화분의 이파리가 파르르, 흔들렸다. 어찌된 일인지 더피의 잎사귀들이 말라비틀어져 있었다. 매일 잎사귀가 흥건하도록 화분에 물을 주던 사람이었다. 방치된 지 오래되어 보였다. 시든 줄기 끝에 까만 점들이 곰팡이의 얼룩처럼 퍼져 있었다.
     
    나는 책장으로 다가가 눈앞에 보이는 책 한 권을 꺼내 바닥에 던졌다. 옆으로 나란히 꽂힌 책들을 연이어 떨어뜨렸다. 책들은 일정한 간격을 두고 바닥에 곤두박질쳤는데 책이 떨어질 때마다 거실바닥이 탁, 탁, 울렸다. 울림은 묘한 느낌으로 나를 부추겼다. 나는 집어내기의 달인처럼 책을 바닥으로 던졌고 발작처럼 손을 멈추지 못했다.
     
    바닥 여기저기 뒹구는 책들을 본 뒤에야 내가 한 짓을 깨달았다. 책장 한 칸이 텅 비어 있었다. 감정적으로 그의 공간을 흩트릴 의도는 없었다. 내가 한 짓에 분명한 의도를 찾아내야만 했다. 내게는 두 번째 ‘자발적 참여’인 셈이었다.
     
    나는 한 발짝 뒤로 물러서서 책장의 빈곳을 물끄러미 응시했다. 풍요 속의 빈곤이란 저런 걸 두고 하는 말 같았다. 빈틈없이 채워진 책들 사이에서 볼품없이 비어버린 공간. 단단하지 못하고 어딘가 모자라 보이는, 어쨌든 지지리도 빈곤해 보였다.
     
    꽂혀 있는 책들 중에서 아무것도 덧칠 되지 않은 무채색 계열의 책들을 골라내 보기로 했다. 그것들을 빈 책장에 꽂았다. 책들은 어두운 색으로 시작, 점차 명도를 낮춰 배치했다. 책장에 책들이 채워질수록 색들이 사라져버리는 기이한 기분이 들었다.
     
    책장의 빈 공간이 보기 좋게 채워졌다. 이마의 땀을 훔치면서 바뀐 책장을 훑어보았다. 화려한 책들 사이에서 아무 색도 가미되지 않은 무채색의 공간이 눈에 들어왔다. 바뀐 책들은 짙은 색으로 시작해 옆으로 갈수록 조금씩 옅어졌다. 반대쪽에서부터 보면 서서히 짙어졌다. 짙고 옅음이 물결처럼 책들 사이의 경계를 무너뜨렸다.
     
    발밑에는 책장에서 밀려난 책들이 너저분하게 널려 있었다. 거치적거리는 책들 사이로 메모지, 명함 같은 것들이 발에 밟혔다. 책갈피 사이에서 떨어져 나온 것들이었다. 간단한 처방전에서부터 약도, 전화번호가 적힌 소소한 메모들. 그중에 작은 수첩 하나가 눈에 띄었다. 나는 수첩을 집어 들었다.
     
    수첩 속에는 포스트잇 묶음이 끼워져 있었다. 그것들을 휘리릭 넘겨보았다. 그가 남긴 메모들이었다. 냉장고에 붙이지 않고 수첩에 따로 넣어둔 이유가 뭘까. 나는 어쩐지 그의 일기장이라도 훔쳐보는 기분에 현관 쪽을 흘금거리며 페이지를 넘겨보았다.


    유진 얼굴에 흑점
    뒤틀린 유진의 팔과 다리
    망막의 변성
    태양의 흑점
    black spot

     
    메모는 그게 전부였다.
     
    나는 다른 메모가 더 있는지 수첩을 살펴보았다. 아무것도 적히지 않은 여백의 수첩 중간쯤 반으로 접힌 페이지가 보였다. 조심스럽게 그것을 펴자 생소한 글자가 눈에 들어왔다.


    황반변성

     
    굵은 펜으로 눌러쓴 글자들은 정갈하면서도 조금씩 휘어 있었다.
     
    나는 책장에서 의학백과사전을 뽑아 그것에 대해 찾아보았다. 각종 질환들이 가나다순으로 분류되어 있어 어렵지 않게 찾을 수 있었다.
     
    망막에 비정상적 혈관이 생겨 이 혈관에서 누출된 혈액의 원인으로 시력저하를 유발하는 질환.
     
    그것은 몇 줄의 설명과 더불어 실명이라는 말로 끝을 맺고 있었다. 한쪽 눈을 가리고 격자무늬 중앙에 검은 점을 봤을 때 무늬가 휘어지거나 선이 보이지 않는 것으로 진단을 내린다고 했다.
     
    나는 하나라도 놓칠까, 글자들을 손으로 짚어가며 증세와 치료법들을 찾아 읽었다. 다행히 조기 진단은 약물 치료나 수술로 실명의 진행을 낮출 수 있다고 적혀 있었다.
     
    그는 자신과 관련되지 않은 일들을 무분별하게 적어놓는 사람이 아니었다. 거기에 적힌 대로라면 그는 지금 중요한 것을 잃어가는 중이었다. 정확하고 예리하게 사물을 보던 그의 시선이 흔들리고 있었다.
     
    나는 실눈을 뜨고 주위를 둘러보았다. 사물이 흔들리고 뭉개져서 저절로 얼굴이 찡그려졌다. 빛이 가뭇없이 사라지고 있었다. 망막을 뚫고 나온 혈관이 터지면서 그의 눈에 흑점들을 만드는 것이 그려졌다. 태양의 흑점처럼 어느 날부턴가 그의 눈에 생긴 검은 부분들. 노트에 뿌려진 잉크 같은 점들로 이루어진 그의 세상. 나를 보며 찡그리던 낯선 표정들, 검은 점으로 덮인 시든 더피의 모습이 그제야 해독이 되었다. 왜곡되지 않은 진짜 내 얼굴을 보기 위해 여러 번 시선을 옮겼을 그가 비로소 이해되었다.
     
    의학백과사전을 접어 책장 위에 돌려놓았다. 바닥에 흐트러진 책들도 하나씩 주워 모았다. 벌어진 입으로 체온보다 뜨거운 공기가 밀려들고 있었다. 말라비틀어질 것 같은 열기 속에서 희미하게 도어락 누르는 소리가 들려왔다. 나는 그 자리에 선 채로 가만히 그를 기다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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