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9년 11월 13일 (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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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야기가 있는 공간 (1) 진해 황해당

아픔, 비극, 번영 역사의 모든 날들이 머물다 간 곳
1930년 일본군 주둔한 진해 … 오롯이 일본을 위한 공간들

  • 기사입력 : 2017-01-05 22: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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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주위를 둘러보면 이야기를 담고 있는 곳들이 있습니다. 사람들이 살아온 이야기, 살아가는 이야기가 가득한 사람냄새가 진하게 밴 곳. 그곳은 누군가의 집이거나 가게거나 마을이거나 별다른 이름 없는 어떤 곳일지도 모릅니다. ‘이야기가 있는 공간’은 우리 주변에 있는 그런 곳을 찾아가는 여정입니다. 늘 그 자리에 있었지만 잘 몰랐던 우리 주변의 공간을 둘러보고 그냥 지나쳐 버리기엔 아쉬운, 그 속에 담긴 이야기를 찾아내 소개하려 합니다. 우리가 살아가는 지역과 이웃들의 이야기에 좀 더 귀 기울이는 시간이 되길 바라 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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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창원시 진해구 황해당 앞에서 주인인 정기원(왼쪽)씨가 황해당에 얽힌 이야기들을 하고 있다. 2층 왼편에 덧문을 수납하는 공간과 당시 창문의 형태가 그대로 남아 있다./성승건 기자/


    빛바랜 청록색 간판은 칠이 반쯤 벗겨졌다. 청록색 바탕 위 하얀색 글자는 세 개 중 두 개가 떨어져 나갔다. 마지막 글자도 일부만 마지막 잎새처럼 간신히 매달려 있다. 그래도 글자가 있던 흔적은 남아 가게 이름을 알아보긴 어렵지 않다. ‘황해당’. 위에는 작은 글씨로 ‘인쇄, 기념패, 복사, 청사진, 도장’이라고 적혀 있다.

    창원시 진해구 중평동 23 황해당인판사. 알고 보면 건물은 간판보다도 더 세월의 흔적이 짙다. 황해당 건물의 탄생은 일제강점기인 1930년대로 거슬러 올라간다. 당시 진해는 일본의 군항(軍港)이었다. 일제는 러일 전쟁을 일으키면서 대규모 군대를 주둔시키기 위한 장소로 현재의 진해(옛 웅천군)를 골랐다. 1912년부터 현재 진해 중앙동 일대를 중심으로 본격적으로 군항도시가 건설되기 시작했다. 중앙동 한가운데 원형로터리가 생겼고 욱일기 형상으로 8갈래의 길이 뻗어났다. 각종 해군 기지와 행정기관이 세워졌고 이에 따라 상점과 주택 등 생활기반도 속속 들어섰다. 온전히 일본인을 위한, 일본식 시설들이었다. 황해당 건물도 그중 하나였다.

    황해당 건물은 전형적인 일본식 서민 주택인 장옥(長屋)의 일부다. 완공 시기는 1938년으로 추정된다. 장옥은 일본어로는 나가야(ながや)라고 하는데 하나의 지붕을 두고 길게 지어진 목조 연립주택으로 1층은 상점, 2층은 주거 용도로 지어진 복층 구조의 주상복합건물이다. 황해당이 있는 중평동 장옥 건물은 6개의 집이 연결돼 있는 구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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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938년에 지어진 길다란 목조 연립주택 낡은 계단이 오랜 역사를 보여줍니다

    현재 6개 가구의 1층에는 각각 황해당, 베이글 가게, 컴퓨터 수리점, 보쌈 가게, 컴퓨터 잉크·토너 가게, 미용실이 영업 중이다. 한 지붕 아래 집들은 그간 각각의 주인을 만나 세월을 따라 조금씩 외관이 변했다. 사람들이 필요에 따라 조금씩 손보고 고쳐 쓴 탓이다. 가장 앞에 있는 황해당은 6가구의 집 중에서도 당시의 원형이 가장 많이 남아 있는 곳이다. 2층 창문과 바로 옆에 있는 덧문 수납장, 2층 바닥에 깔린 다다미, 천장 지붕 등이 모두 약 100년의 시간을 견뎠다.

    이곳의 주인은 인장공예장인 정기원(83)씨다. 그는 1958년 처음 이 공간과 인연을 맺은 후 지금까지 머무르고 있다. 그의 도움을 받아 이곳에 얽힌 이야기를 더듬어봤다.

    황해당 건물의 첫 주인은 미지마 아이라는 중년의 일본인 내외였다. 이들은 1층에 살림집을 두고 2층은 여관으로 운영했다. 여관이라는 용도는, 좁은 복도를 따라 방이 6개로 나눠져 있고 각 방에는 붙박이벽장(오시이레: おしいれ)이 있는 황해당 건물 2층의 특이한 구조에서 짐작할 수 있다. 이들은 현재 청록색 황해당 간판이 걸려 있는 1층 가장자리 공간에 ‘文房四友(문방사우)’와 ‘煙草(연초)’라는 문구를 붙이고 문방구와 담배 가게도 함께 운영했다. 당시 건물 맞은편(현 데시앙아파트)은 진해읍사무소를 포함한 각종 행정기관이 많아 사람들의 발길이 잦았다. 양장 차림의 일본인들이 분주히 거리를 오가는 모습을 어렵지 않게 상상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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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좁다란 복도를 따라 나뉜 6개의 방 … 여관으로 운영돼 수많은 이들이 묵었고

    1945년 해방 후에는 한국인 건축업자 내외가 새 주인이 됐다. 이들은 2층 여관은 그대로 운영했고 1층 담배 가게가 있던 자리는 행정서기를 하던 사람에게 세를 줬다. 1958년 10월 이 셋방에 정기원씨가 다시 세를 들었다. 셋방에 이중으로 세를 든 특이한 형태였다. 방세도 건물주가 아닌 행정서기에게 지불했다고 한다. 황해도 벽성 출신인 정씨는 지금의 건물에 ‘황해당인방(黃海堂印房)’이라는 간판을 걸고 도장 제작과 인쇄를 시작했다.

    그가 1층에 세든지 얼마 지나지 않았을 무렵, 황해당 건물에 큰 위기가 있었다. 2층 여관방에서 불이 났던 것. 목재로 지어진 데다 한지붕 밑에 6가구가 붙어 있는 구조였기에 불이 나면 장옥 건물 전체가 위험했다. 다행히 연기가 나기 시작했을 때 정씨가 발견했다. “바로 올라갔는데 문이 잠겨 있어서 ‘불이야’ 소리 지르고 문을 부수고 들어갔어요. 군대에 있을 때 배운 화재 대처법이 아주 유용했지요.” 정씨가 당시를 회고했다. 불을 낸 사람은 미군을 상대로 성매매를 했던 일명 ‘양공주’였다. 방에서 담배를 피우다 그 담뱃재가 이불에 떨어져서 불이 났다고 한다. 여관 투숙객에서 당시 진해에 드리웠던 6·25전쟁의 그림자를 엿볼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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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정씨는 1960년대 초 황해당 건물을 인수했고 활판기계, 제판기계 등을 들여 인장업과 함께 대규모 인쇄업을 시작했다. 1968년 장천동에 한양화학(지금의 한화L&C) 공장, 1971년 이동에 동방유량(지금의 사조해표) 공장이 들어서면서 1960년대 후반 황해당은 최고 전성기를 맞았다. 각종 인쇄와 도장 수요가 빗발쳐 가게는 밤에도 불이 꺼지지 않았다. 종업원만 5~6명을 뒀고 밤에는 아르바이트생이 따로 있을 정도였다. “그때는 밤에 근무해도 수당을 잘 안 챙겨줬어요. 100원짜리 국수 한 그릇 주고 마는 그런 곳이 많았는데, 나는 종업원들 밤 근무까지 다 정산해 줬지요.”

    황해당은 1990년대 들어 점차 쇠퇴하기 시작했다. 컴퓨터가 보급되던 시기다. 사람이 하던 일을 컴퓨터가 대체하면서 사람이 줄었고, 사람의 손이 필요하던 각종 활판, 제판기계가 뒤로 밀려났다. 성업 때 하루에 100~200개 도장을 만들어내던 그의 손도 차츰 쉬는 일이 많아졌다. 현재 그는 한 달에 2개 정도의 도장만 만든다. 당시 사용됐던 각종 기계들은 그의 1층 작업실 한쪽 구석에 잠들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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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960년대 인쇄업으로 전성기 누렸어요 … 밤늦도록 기계는 쉴새 없이 돌아갔죠



    일제의 침략과 광복, 6·25전쟁, 산업화. 황해당 건물이 지나온 세월에는 한국 근현대사가 고스란히 묻어난다. 주인 정기원씨에게 앞으로 이 건물이 어떤 곳이 됐으면 하는지 물었다. “나라의 역사를 올바로 알 수 있는 곳이 됐으면 하지요. 이곳이 왜 세워졌는지부터 시작해서 우리나라 근대사를 제대로 배우는 게 꼭 필요해요. 제대로 복원하고 또 제대로 교육할 수 있는 사람이 상주해 박물관처럼 쓴다면 좋겠어요.”

    현재 황해당에는 정씨와 같은 시대를 살았던 사람들이 알음알음 찾아든다. 격변의 시대를 지나온 이곳은 이제는 지역 어르신들의 사랑방이 되어 가는 모양이다. 황해당에는 오늘도 이야기가 쌓여간다.

    김세정 기자 sjkim@knnews.co.kr

    도움말= 진해군항마을역사관, 유진상 창원대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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