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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년 04월 20일 (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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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촉석루] 시루봉의 기운을 보냅니다- 천영훈(극단 미소 대표)

  • 기사입력 : 2017-01-11 07: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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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창원 명서동 지하실에는 고래가 산다.” 어느 시인이 내게 한 말이다.

    2016년이 저무는 날 아는 후배가 송년 술이라도 한잔하자며 지하실을 찾아왔다. 우리는 어김없이 “에루화 좋다, 술이나 마시자. 부어라, 마셔라” 하였고, 비틀거리는 나를 보며 걱정스런 한마디를 꺼내 놓는다. 지하실에 앉아서 술만 마시니까 체력이 걱정된다고. 새해에는 자기를 따라서 아침에 산이라도 한 번씩 가자고. 술 취한 김에 호기롭게 덜컥 약속은 해버렸고 해는 바뀌었다.

    1월이 시작되는 첫 월요일 아침에 전화를 한다. 산에 가자고. 사실 연일 술로 체력이 되려나 걱정을 하고 나선다. 후배는 시루바위의 기운을 받고 오자며 진해 시루봉으로 코스를 잡았단다.

    고교 시절 ‘엄마의 젖가슴같이 생긴 산이여’라며 노래하던 그 산이라 구미가 당겼다. 지난번 친구들과 천자봉으로 산행을 했을 때도 먼발치에서 보고만 왔던 게 아쉬움이 컸었는데. 드디어 가는구나 하며 내심 설레기도 했다. 그런데 역시 체질이 문제다. 헥헥거리며 후배의 뒤를 따르자니 헛구역질은 나오고, 내가 왜 이런 약속을 했던가 하는 후회가 밀려왔다. 산에 자주 다녀 본 후배는 이런저런 이야기와 함께 내게 보폭을 맞춰 기다려 주기도 하고, 뒤에서 밀어주기도 했다.

    쉬엄쉬엄 산으로 오르는 길에 많은 생각을 갖게 하는 아침이었다. 질척거리던 길이 있는가 하면 돌밭 길도 있고 기나긴 계단 길도 있고…. 우리가 살아가는 길도 탄탄대로일 수만은 없을 것이고 굽이굽이 사연이 있을 것이다.

    땀을 삐질삐질 흘리며 중반쯤 오르니 속은 진정이 되는데 쉬는 횟수가 잦아진다. 힘겹게 정상에 오르니 발아래 펼쳐진 진해만의 그림 같은 풍경에 마음은 녹고, 정상의 매서운 칼바람은 ‘2017년은 좀 더 단단히 살아라’라며 나의 멱살을 잡는다.

    내려오는 길에 문득 드는 생각은 ‘산을 왜 오르지? 내려오기 위해서다’라는 혼자의 생각으로 피식 웃음이 난다. 그런데 이 약속 언제까지 지킬 수 있을지 후배의 얼굴이 갑자기 무서워진다.

    천영훈 (극단 미소 대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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