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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년 03월 29일 (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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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교칼럼] 용서의 길

  • 기사입력 : 2017-02-22 07: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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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신은근 신부 (의령성당 주임)


    시누이가 미워 성당에 나가기 싫습니다. 시집와서 어려울 때 참 많이 괴롭혔습니다. 시어머니께 고자질하고 없는 말로 이간질했습니다. 기도하려면 시누 얼굴이 떠올라 마음이 산만해집니다. 성경책을 펴도 시누 생각이 나면 그만 덮게 됩니다. 이런 제가 성당에 다니면 뭘 합니까? 제 업보라 여기며 용서하려 해도 어떻게 하는 것이 용서인지 알 수가 없습니다.

    괴롭혔다는 시누이는 멀쩡한데 당사자는 이렇게 가슴앓이하고 있습니다. 정말 용서는 무엇인지요? 무작정 잊어버리는 행위인지요? 그러자니 막막합니다. 멀쩡한 기억을 억지로 잊을 순 없기 때문입니다. 내 안의 상처가 선명한데 어떻게 없던 것으로 되돌릴 수 있을는지요?

    미움은 감정입니다. 느낌이 쌓인 결과일 뿐입니다. 윤리적 잣대를 들이댈 수 없다는 말입니다. 미워하는 감정은 죄가 아니라는 말입니다. 의지완 상관없는 느낌인 까닭입니다. 다만 감정에 끌려 행동(액션)이 나타났을 때 윤리적 평가가 가능합니다. 행동은 책임을 동반하기 때문입니다.

    용서는 덕(德)입니다. 예부터 덕을 쌓으려면 참고 절제했습니다. 자신 안에 덕이 생겨날 때까지 인고의 시간을 버티어 냈습니다. 마찬가집니다. 용서의 덕에 도달키 위해서도 시간이 요구됩니다. 첫눈에 싫은 사람은 있어도 첫눈에 미운 사람은 없습니다. 미움은 만들어지는 시간이 있기 때문입니다.

    용서도 만들어지는 데 시간이 걸립니다. 무시하고 단번에 용서하려 들면 늘 실패합니다. 미움이 쌓인 만큼은 아니더라도 용서를 위한 시간은 있어야 합니다. 순간적 결심만으론 누구도 참 용서를 체험할 수 없습니다.

    용서는 잊는 행위가 아니라 했습니다. 미운 짓을 했기에 미운 겁니다. 미운 감정은 당연한 결과입니다. 먼저 상처를 치유해야 합니다. 그리고 치유의 출발은 늘 내 쪽에서 시작해야 합니다. 첫걸음은 보복하지 않기로 마음 정하는 일입니다. 이것이 첫 단추를 끼우는 행동입니다. 그러면 삶이 달라집니다. 서서히 상처가 아물고 있음을 깨닫게 됩니다. 선한 기운이 끌어주기 때문입니다. 네가 바뀌면 나도 바뀔 수 있다는 건 언제나 유혹입니다

    주님은 말씀하셨습니다. ‘누가 뺨을 치면 다른 뺨을 돌려 대 주고 겉옷을 빼앗거든 속옷마저 주어라.’ 하지만 이렇게 할 수 있는 사람은 없습니다. 그렇다면 어찌하여 이 말씀을 남기셨는지요? 추측컨대 사랑의 길을 알려 주기 위함인 듯합니다. 어디까지 해야 완벽하게 사랑할 수 있는지 답을 제시하신 것 같습니다. 자식을 위해 그렇게 사신 분들은 분명 있습니다.

    용서 역시 사랑의 한 표현입니다. 시작이 반이라 했습니다. 사랑의 마음으로 출발하면 보복하지 않겠다는 첫 단추를 쉽게 끼울 수 있습니다. 2017년 시작하고 어느새 봄을 맞이합니다. 힘들게 했던 사람에게서 이젠 자유로워져야 합니다.

    세월이 약이라 하지만 세월은 약이 아닙니다. 마취제일 뿐입니다. 깨고 나면 상처는 언제나 그대로 있습니다. 용서와 자유만이 치유가 됩니다. 주관적 입장에서 보면 삶은 고달프기 마련입니다. 나만 고통받고, 나만 힘겹게 살고 있는 것 같습니다. 그러나 주관적 시선을 객관화하기 시작하면 자신의 위치를 편안하게 볼 수 있습니다. 그리고 마침내 운명 속에 들어와 있는 보이지 않는 큰 손길을 보게 됩니다. 신은근 신부 (의령성당 주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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