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바일  |   유튜브  |   facebook  |   newsstand  |   지면보기   |  
2024년 04월 20일 (토)
전체메뉴

[세상을 보며] 나는 자랑스러운 태극기 앞에- 이문재(사회2부장)

  • 기사입력 : 2017-03-02 07:00:00
  •   
  • 메인이미지

    50세 전후 세대들은 살아남기 위해 무조건 외워야 했다. 구구단, 국민교육헌장, 국기에 대한 맹세를 시작으로 수학공식, 영어 숙·단어, 원소기호, 역사, 지리 등등. 학교에서 끝나는 게 아니었다. 군대에서도 외우기는 무탈하고 편히 지내는 데 필수였다. 요즘 세대처럼 궁금하거나 필요한 정보가 있으면 스마트폰을 아래 위로 훑어보는 호사는 꿈도 꾸지 못했다.

    제대로 외우지 못하면 손바닥이며 종아리는 선생님의 매운 회초리에 무방비로 맡길 수밖에 없었다. 참 비교육적이었다는 생각 한편으로, 지금도 입만 열면 자동으로 튀어나오는 몇몇 구절에 ‘매 맞고 배운 게 오래가는구나’ 싶어 씁쓸한 미소를 짓게 한다.

    필자의 기억으로는 가장 먼저 외우기 시작한 게 국민교육헌장이었지 싶다. 이후 국기에 대한 맹세나 구구단 순이었다. 70년대 전후해 학교를 위시한 전체 사회는 애국과 반공에 집중했다. 나라에 충성하고 공산당을 밀어내지 않으면 당장이라도 대한민국이 잿더미로 변할 듯한 분위기를 조성했다.

    한 해에도 몇 차례나 이와 관련된 글짓기, 사생대회, 웅변대회 등이 열렸다. 덕분에 학교 성적이 좋은 녀석들은 매번 대회에 차출되는 고생을 해야 했다. 이와 함께 북한이 관련된 조그마한 사건이라도 발생하면 총궐기대회가 며칠씩이나 전국을 돌며 개최됐다.

    이때의 ‘태극기’는 애국의 상징이었다. 매일 아침 국기게양식이 거행됐고, 저녁이면 국기하강식이 있었다. 하강식을 할 때면 가던 길을 멈추고 왼쪽 가슴에 손을 올려야 했다. 서로서로 감시자가 돼 애국심이 있는지 없는지를 살피기도 했다. 영화관을 가도, 운동회가 열리는 학교운동장, 마을의 조그마한 행사에도 태극기는 늘상 중심에 있었다. 그러다 보니 어느 순간부터 태극기를 마주하면 가슴이 먹먹해졌다. 경건함인지, 답답함인지는 분명하지는 않았지만 중압감이 느껴졌다.

    이후 태극기는 각종 시국 관련 사건·사고에 등장하면서 필자에게 조금은 외면하고 싶은 ‘깃발’이 되고 말았다.

    ‘태극기’를 가벼운 마음으로 다시 보게 된 것은 스포츠 덕분이었다. 올림픽이나 월드컵 등 각종 국제대회에서 펄럭이는 태극기는, 어린 시절 태극기로 인해 억눌렸던 마음을 풀어주었다. 세계 무대에서 휘날리는 태극기는 반공이나 멸공을 떠나 자랑스러운 조국과 다름없었다. 승리와 함께하는, 또 승리를 기원하며 힘차게 나부끼는 태극기는 억지로 짜내지 않아도 애국심을 솟구치게 했다. 2002년 월드컵 때의 거리응원이 대표적으로, 필자의 태극기 스트레스를 말끔히 해소시켰다.

    요즘 ‘태극기’가 또 이상해졌다. 태극기가 특정한 이념을 대신하는 물건이 되고 말았다. 이념의 옳고 그름을 따지고 싶지는 않다. 단지 왜 태극기가 또 다른 이념의 상징물인 촛불과 대립하고 있는가다. 탄핵정국은 우리 사회를 태극기와 촛불로 쪼개고, 태극기는 보수, 촛불은 진보로 규정짓고 말았다. 또다시 먹먹해진다. 태극기를 마냥 자랑스럽고 좋아할 수 없게 됐다. 태극기가 무엇을, 어떤 이념이 아닌, 바라만 봐도 가슴 뭉클하게 하는 ‘대한민국의 깃발’이었으면 좋으련만.

    하루빨리 정국이 안정돼 태극기가 우리 모두의 자랑스러운 국기(國旗)가 되길 바란다. 조국을 되찾기 위해, 조국을 지키기 위해 피를 쏟고 살점을 도려내며 지켜온 깃발이 아니던가.

    이문재 (사회2부장)

  • < 경남신문의 콘텐츠는 저작권법의 보호를 받는 바, 무단전재·크롤링·복사·재배포를 금합니다. >
  • 이문재 기자의 다른기사 검색
  • 페이스북 트위터 구글플러스 카카오스토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