합천 삼가 3·1만세의거 기념탑.
삼가에서 만세의거 일어나다
3·1혁명 당시 서울에 있던 정현상(鄭鉉相)이 독립선언서를 가지고 고향으로 왔고, 이기복(李起馥)도 독립선언서를 구해왔다. 이에 따라 3월 18일 오후 5시 장꾼으로 가장한 수백 명(일제 경찰 기록 200명)의 민중이 삼가 시장에 모여 만세시위를 하자, 경찰은 주동 인물 6명을 구금했다.
이튿날 합천읍에서 500여명이 만세시위를 벌였고, 다음 날인 20일 대양면에서 전날 구금된 주동자를 구하기 위해 김영기(金永騏) 등 12명의 결사대를 조직해 전날 구금한 심재기(沈載祺) 등 17명을 즉시 석방하라고 강력히 요구하면서 시위가 벌어졌다. 경찰이 공포를 발사하자 결사대원 추용만(秋鏞滿)은 분함을 이기지 못하고 태극기를 단 대나무 장대로 경찰서장과 순사 5~6명의 머리를 후려갈기며 돌진하고, 민중들은 도끼와 낫을 들고 육박하자 경찰은 일제히 발포해 김영기, 추용만 등 4명이 현장에서 숨지고 11명이 부상을 입었다.
대병면에 살던 정태섭(鄭泰燮)은 서울로부터 독립선언서 500매를 가져와 이를 극비리에 합천군 내 각 면에 배부했고, 임상종(林尙鍾)도 서울에서 독립선언서를 감춰 가지고 고향으로 돌아와서 유지를 초청해 거사를 협의한 끝에 거사 일을 3월 20일 창리 장날로 정하고 준비를 서둘렀다.
3월 20일 오후 1시 장에 모인 민중은 약 4000명(일제 군 기록 약 3000명)이었는데, 경찰이 총을 발사하자 민중은 주재소 건물을 파괴하고 문서를 소각한 후 대병면사무소로 달려가 서류를 소각했다. 대병면 창리 의거에 대해 당시 일제군 헌병대사령부는 ‘특히 창리에 있어서의 소요는 가장 난폭 낭자를 극하여 주재소를 파괴하고, 서류 등을 소훼(燒毁)해 본도 소요 중 함안·군북의 소요와 더불어 격렬 흉포한 소요이다.’(조선소요사건상황 107쪽)라고 기록했다.
각 면이 연대한 대규모 의거
초계면 초계 장날인 21일 약 4000명(일제 군경 기록 3000명)이 만세시위를 벌였고, 이틀 뒤인 23일 상백면(上伯面, 현재 쌍백면)에서 만세의거가 있었다. 이곳에 사는 72세인 공사겸(孔士謙)은 정원규(鄭元圭)·정치규(鄭致圭) 등과 더불어 약 4000명(도장관 기록에는 약 3000명)의 민중들을 이끌고 만세시위를 전개해 크게 위세를 떨쳤고, 약 10리 떨어진 삼가읍 시장으로 나아갔다. 가회면과 생비량면 민중들도 농악을 울리면서 속속 몰려들어 1만2000~1만3000명에 달하였는데, 일제의 성토장이 되었다.
강연하던 임종봉(林鐘鳳)이 헌병의 총격에 의해 계단 아래로 굴러 떨어지자, 이를 본 민중들은 분노가 일시에 폭발해 경찰주재소와 우편소로 성난 파도같이 몰려갔다. 일제 군경은 일제히 이들에게 총격을 가하여 순식간에 공사겸 등 13명이 현장에서 숨지고, 30여명이 중상을 당하는 참사를 겪었다 또 묘산면·야로면에서도 만세시위가 있었는데, 박은식의 ‘한국독립운동지혈사’에는 경상도 합천(陜川) 160명, 합천(合川, 陜川의 임시정부의 기록 오류로 추정) 12명이 순국하고, 합천(陜川) 부상자는 518명이라고 기록했다.
(경상대 영어영문학과 교수·문학박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