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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7년 11월 23일 (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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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야기가 있는 공간 (7) 창원 김종영 생가

두 예술가를 품은 고향의 봄, 꽃대궐

  • 기사입력 : 2017-04-20 22: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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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복숭아꽃, 살구꽃, 아기진달래. 이 모든 꽃이 한곳에 피는 장소가 있었다. 봄이면 갖가지 꽃들이 피어 ‘울긋불긋 꽃대궐’을 이루던 곳. 1910년대 창원읍 소답리(현 창원시 소답동) 일대가 그곳이었다. 커다란 기와집과 아름드리 고목이 가득하고, 진달래 피는 천주산과 미나리밭이 드넓게 펼쳐진 남산이 한눈에 보이던 작은 마을. 우연히 이 동네로 이사 온 한 소년은 자신이 보았던 마을의 아름다운 풍경을 잊지 못해 시로 남겼다. 이것이 아동문학가 이원수가 ‘고향의 봄’을 쓰게 된 계기로, 어린 이원수가 당시 마을을 다니면서 봤던 풍경이 바로 창원 소답동에 있는 조각가 우성 김종영의 생가 일대다.

    이원수는 양산에서 태어났지만 열 달 만에 창원읍 중동리로 이사를 왔고, 9살 때까지 살았다. 그는 5세를 전후해 소답리에 있는 서당을 다녔다. 정확하지는 않지만 현재의 창원향교였던 것으로 짐작된다. 보퉁이에 동몽선습, 통감 등의 한문책을 싸서 서당으로 가는 골목에는 커다란 기와집이 즐비했다. 봄이면 그 풍경이 장관을 이뤘다. 커다란 기와집 담 너머로 복숭아꽃과 살구꽃이 보였고 천주산에는 분홍빛 진달래가 물결쳤다. 특히 어린 이원수의 눈에 비친 기와집은 그야말로 ‘대궐’이었다. 아마 그가 가난한 일용직 목수의 아들이었다는 사실이 그 기와집을 더욱 거대하게 보이게 만들었을지도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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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창원시 의창구 소답동 김종영 생가./성승건 기자/

    반면 김종영은 그 거대한 대궐에서 태어난 도련님이었다. 그는 전형적인 사대부 집안의 장손으로, 보다 자세하게는 ‘영남 사대부 가문 김해 김씨 혈통을 22대째 이어온 성재 김기호와 광주 이씨 이정실의 오남매 중 장남’이라고 기록돼 있다. 생가를 지은 그의 증조부는 구한말 지방 군수를 역임한 사람이었고, 그의 고조부는 현재 마산 봉암다리에서 창원 명서동에 이르는 해안에 드넓은 염전을 갖고 있던 만석꾼 부자였다. 부와 권력을 모두 갖춘 집안에서 태어난, 요즘말로 하면 그야말로 ‘금수저’였던 셈이다. 그의 집이 어찌나 컸던지 마을에서 멀찍이 떨어진 곳에서도 한눈에 들어올 정도였다고 한다. 봄이면 꽃이 만발했던 이 집은 마을 사람들에게 ‘소답 꽃집’으로 불렸다고 전해진다.

    김종영의 예술적인 기질은 그의 가풍에서 영향을 받았던 것이라는 분석이 많다. 그의 증조부는 엄격한 성향의 사대부였던 것으로 알려져 있다. 증조부는 집의 별채에 ‘사미루(四美樓)’라는 이름을 붙였는데 ‘사미’란 난초, 대나무, 바위, 사람을 뜻하는 것으로 군자가 갖춰야 할 자세인 굳건함, 고고함, 절개를 상징하는 것들이다. 어린 김종영이 사미루에 올라 조부로부터 군자의 덕목에 대한 가르침을 받는 모습을 어렵지 않게 상상할 수 있다. 또한 김종영의 부친은 시, 글씨, 그림에 능통했던 까닭에 김종영은 어릴 적부터 문화예술을 자연스럽게 접할 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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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아동문학가 이원수


    ‘소답 꽃집’은 두 소년에게 독특한 영감을 준 장소였다. 이원수가 아동문학가로 성장하는 계기가 됐고 김종영이 예술적 기질을 형성하는 바탕이 됐다. 이원수는 마산으로 이사한 후인 1926년, 잡지 ‘어린이’ 4월호에 소답리의 추억을 담은 ‘고향의 봄’을 발표하면서 본격적으로 아동문학에 입문하게 된다. 또한 김종영은 유년시절 집에서 서예를 하며 한학을 배운 경험을 바탕으로 훗날 ‘고전적이면서도 현대적인’ 작품 세계를 확립할 수 있었다.

    무엇보다도 한국 문학과 미술사에 족적을 남긴 두 예술가가 동시대에 같은 동네에서 유년시절을 보냈다는 점은 특별하다. 물론 가난한 집안의 아들이었던 이원수와 부잣집 도련님이었던 김종영이 함께 어울려 놀지는 않았을 테지만, 이원수의 자전적 소설인 ‘5월의 노래’에는 제법 흥미로운 이야기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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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조각가 김종영


    ‘아버지는 이사온 지 한 달쯤 지나 동네에서 제법 잘사는 김주사네 집 목수일을 하게 되었다. 나는 아버지를 따라 그 집에 가서 밥도 얻어먹고 놀았다. 아버지가 나무토막으로 장난감 자동차를 만들어주셔서 갖고 놀았는데 안방 도련님이 자기 것이라고 해서 싸움이 났다. 그 일로 나도 혼나고 아버지도 불려가서 혼이 났다.’

    소설 속의 김주사 댁과 안방 도련님이 김종영과 관련이 있는지는 알 수 없다. 그저 추측일 뿐이지만 유년시절의 어느 날 어느 때, 4살 차이였던 두 소년(이원수는 1911년, 김종영은 1915년생이다)이 한곳에서 마주쳤을지도 모른다는 상상은 꽤나 즐겁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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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970년대 김종영 생가./이원수문학관/


    훗날 김종영이 그의 생가를 배경으로 ‘고향의 봄’이라는 시가 만들어졌다는 사실은 알았다고 한다. 두 사람이 1978년 대한민국예술원에서 수여하는 대한민국예술원상을 동시에 수상하게 된 이후다. 이원수가 문학, 김종영이 미술분야 수상자였다. 김종영의 육촌 동생인 김종두(79)씨는 “수상 후에 형님(김종영) 아들인 김익태가 이원수 선생에게 고향의 봄 배경이 소답동 생가 쪽이 맞느냐고 물어봤더니 이원수 선생이 맞다고 확인해줬다”며 “그때부터 형님이 그 사실을 알았다”고 말했다. 다만 이후에도 두 사람이 직접적으로 교류하거나 친분이 있었다는 기록은 없다. 활동하던 분야가 달라 만날 일이 별로 없었던 데다 김종영의 내성적인 성격이 한몫했을 것으로 짐작된다.

    소답 꽃집, 꽃대궐은 산업화를 거치며 본래의 모습을 많이 잃었다. 1970년대 후반, 창원이 본격적으로 산업도시로 변모하기 시작하면서 김종영 생가가 있던 소답동 일대를 포함한 창원 곳곳은 도시계획에 따라 개발이 이뤄졌다. 개발이 진행되면서 주변 경관이 훼손됐고 1994년 집 마당 한가운데 도로가 개설되면서는 집이 완전히 두 동강이 났다. 생가는 현재 남아 있는 본채와 별채였던 사미루 외에 아래채도 있었지만 이때 헐려 형상을 찾아볼 수 없게 됐고, 하나로 이어져 있던 본채와 사미루가 전혀 별개의 공간처럼 떨어져 버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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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970년대 소답동 일대를 배경으로 찍은 이원수.


    잘리고 헐리는 아픔 속에서도 100년 가까운 세월을 견딘 생가지만 그 모습이 예전과 같지 않다는 사실은 못내 안타깝다. 생가를 둘러싸고 있던 ‘성문 밖 개울이며 서당 마을의 꽃들이며 냇가의 수양버들, 남쪽 들판의 푸른 보리’는 사라지고 그 자리에는 주택과 건물이 빼곡이 들어섰다. ‘꽃대궐’도 없다. 개발 당시 생가 인근의 나무가 대부분 잘리고 없어지는 바람에 생가 근처나 안에 있는 식물은 모두 나중에 생긴 것들이다. 지금 생가 안에 있는 나무와 식물들은 김종두씨가 생가에 거주했을 당시 심은 것들이라고 한다. 대문 앞에 푸른 이파리를 드리우고 있는 고목만이 300여 년 세월을 꿋꿋이 버티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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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생가는 최근 20여 년간 타인에게 임대되면서 보존이나 유지가 제대로 되지 않고 있다. 취재를 위해 생가를 찾았을 때는 최근에 살던 사람이 나가면서 버리고 간 쓰레기 더미가 입구에 가득 쌓여 있었다. 생가 관리를 맡고 있는 김종두씨는 앞으로는 집을 좀 더 신경써서 관리할 수 있는 친지들이 살게끔 할 예정이라고 말했다. 김씨는 “고택이라 관리나 유지가 많이 어렵다”며 “다수의 유족들 명의로 돼 있는 사유재산이라 시에 관리를 위탁할 수도 없는 상황이고, 매년 낡아가는 모습을 보는 게 그저 안타까울 따름이다”고 덧붙였다.


    생가 안에 핀 노랑색, 분홍색 꽃은 고택에 봄이 왔음을 알리고 있었다. 생가 마루에 걸터앉으니 불규칙하게 세워진 건물들 사이로 천주산이 눈에 들어온다. 산은 곧 분홍 물결을 이룰 것이다. 두 예술가가 보고 느꼈던 ‘고향의 봄’이 조금은 남아있음에 작은 위안을 얻는다.

    김세정 기자 sjkim@knnews.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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