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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년 03월 29일 (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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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속으로] 고성 향토작가 정해룡씨

고성의 잃어버린 역사 찾는 살아있는 역사
평범한 직장인 생활 중 시인 등단
퇴직 후 향토사 연구 매진하며 고성이야기·독립운동사 등 집필

  • 기사입력 : 2017-04-28 07: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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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정해룡씨가 고성 회화면 당항포에 있는 월이기념관에서 월이에 관한 이야기를 하고 있다.


    경남의 봄이 오는 길목. 물빛 고운 자란만을 품고 텃새처럼 살아가며 고향을 지키는 시인 정해룡(67)씨. 고성의 겉살과 속살을 훑고 있어 책으로 전하는 고성 역사기록자인 정해룡 시인은 고성의 살아있는 역사로 불린다.

    1945년 고성에서 태어나 한국전력에서 평범한 직장인으로 근무하다 퇴직하고 향토사 연구에 매진하고 있는 그는 1992년 시인으로 등단한 후 통영문인협회장, 통영예총 회장을 역임하고 청마탄생 100주년 기념 추진위원장, 고성군지 상근 집필위원 등을 역임했다. 현재는 한국시인협회, 통영문인협회, 청마문학회 회원으로 활동 중이다. 주요 작품은 시집 ‘꿈 하나 남아 있다면’, 산문집 ‘고성의 겉살과 속살을 찾아서’, ‘나무가 들려주는 고성이야기’, ‘고성문화지도’, ‘고성독립운동사’, 소설집 ‘조선의 잔 다르크 월이’ 등을 집필하면서 지역의 대표적인 향토작가로 자리매김했다.

    향토작가라는 말에 애증(愛憎)을 느낀다는 그의 삶 속으로 들어가 보자.

    정 작가는 가난 때문에 문학을 시작했다. 6·25전쟁이 터진 그 무렵 좌우 이념대결의 희생양으로 아버지가 학살당해 얼굴도 모른 채 자랐고, 송곳 꽂을 땅 한 뼘도 없이 어머니가 4남매를 키우는 지독한 가난을 남루한 헌옷처럼 걸치고 살았다고 한다. 중1 때 의지하던 어머니가 돌아가신 후 어린 나이에 허무와 고독을 알았고 결국 가난과 허무와 고독이 자신을 문학으로 이끌었다고 말한다.

    고향 고성에서 시인이라기보다 향토작가로 더 알려져 있는 정해룡씨. 한전에서 정년퇴직을 한 후 향토 적거(謫居)로 제2의 삶을 살고 있는 정 작가는 통영 고성의 아름답고 매혹적인 풍광이 자신을 작가의 길로 이끌었다고 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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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학창시절 문학도로서 제법 긍지를 가졌으나 가난이 싫어 문학을 멀리했다는 정 작가는 술을 한잔 마시면 시가 저절로 나오게 해주는 남해안 천혜의 풍광이 자신을 문학으로 인도했고 1992년 늦깎이 시인으로 등단했다고.

    그는 2012년 ‘조선의 잔 다르크 월이’란 소설로 고성문학계에 또 하나의 사건을 만들었다. 이 소설 월이는 ‘시인 정해룡’을 ‘작가 정해룡’으로 변화시켰다.

    월이는 어머니에게서 들은 이야기가 중심이 됐다고 한다. 통영에서 예총회장을 할 때인 2005년 5월 8일 박경리 선생 장례집행위원장을 맡아서 장례행사를 치른 후 고향 고성을 배경으로 무슨 작품을 썼는가를 생각해 보니 한 편도 없어 부끄러웠다는 정 작가는 2010년 통영예총 회장직을 마친 후 월이를 구상했고 2년여 작업 끝에 2012년 탈고를 했다고.

    “고전은 거의 대개가 작가의 고향 이야기입니다. 일례로 박경리의 소설 ‘김약국의 딸들’이 자신의 고향 통영의 이야기이고 ‘토지’도 그렇다.

    소설 ‘조선의 잔 다르크 월이’는 내 어릴 적 어머니에게서 전해들은 구전으로 지금으로부터 약 420년 전의 이야기다.

    “임진왜란이 일어나기 1~2년 전 승려 복장을 한 왜의 첩자가 하룻밤을 자고 가고자 고성읍 송학동의 무기산(현 송학고분이 있는 산) 아래 무기정(舞妓亭)이란 주막에 들렀는데 그곳의 기생 ‘월이’를 만나게 되면서 일어나는 월이의 활약과 당시의 시대상황을 다룬 소설입니다.”

    정 작가는 무기정 술집 근처에서 태어났고 무기정 술집에 무기정이란 우물이 있어 그 물을 길어 밥해 먹고 나물 씻어 국 끓여 먹고 맹물을 마시고 했기에 누구보다도 월이에 대한 기억이 또렷하게 남아 있다고 한다. 안타깝게도 지금 그 우물은 없다.

    소설 월이 출간 후 재경 고성향인들이 고성의 의기이자 의녀인 월이를 애국충절의 여인으로 기리고자 발 벗고 나섰다. 정 작가의 소설로 인해 2015년 ‘고성향토문화선양회’가 발족됐고 지난해에는 420여 년 전에 죽은 월이의 혼백을 기리는 ‘월이 초혼제’가 치러지기도 했다. 또 ‘월이 둘레길’을 개발해 서울 향인들과 학생들을 비롯한 군민들이 동참해 월이 정신을 기리는 답사시간을 가졌다.

    재경 고성향우들은 고향 발전을 위해 무슨 일을 하고자 해도 계기가 없었는데, 월이를 매개체로 고향과 끈을 잇고 고성 문화를 널리 알리는 활동에 참여하게 된 것이다. 고성향토문화선양회는 월이를 영화로 만들거나 뮤지컬 또는 드라마로 제작하기 위해 여러 가지 아이디어를 모으고 있다.

    정 작가는 자신을 향토작가라고 부르는데 대해 거부감을 나타낸다. ‘향토’라는 말이 들어가기만 하면 사람들이 왠지 촌스럽게 느낀다는 것. ‘향토작가’ ‘향토문화’ ‘향토 사학자’ 하면 서울을 중심무대로 하는 중앙작가나 서울문화, 대학에 몸담고 있는 전공 사학자보다 훨씬 못하게 평가되기 일쑤다고 항변한다. 사실 ‘향토’라는 단어 속에는 고향을 지킨다는 사명감, 애착심 등이 내재되어 자긍심으로 표출돼야 마땅한데 그런 감정보다는 중앙보다 한 등급 낮은 저급의 문화로 인식되는 경우가 더 많다고 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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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향토에 대한 일반인들의 체감적 평가는 야박합니다. 하지만 나는 향토작가가 숙명이고 사명감이라 생각합니다.”

    앞으로의 계획에 대해 개인 작업 활동도 중요하지만 고성의 문학인을 기리는 사업에 좀 더 매진할 생각이라고 한다. 그러기 위해서는 고성군과 고성군의회를 비롯한 군민들의 지원과 성원이 절대로 필요하다고 강조한다. 또 고성문화원이나 고성문협 등의 활동과 우군도 필요하다고 말한다.

    고성이 낳은 위대한 인문학자인 김열규를 기리는 가칭 ‘김열규 인문학상’과 그리스·로마 고전문학을 가장 완벽하게 번역한 당대 최고의 번역가로 불리는 천병희를 기리는 가칭 ‘천병희 번역문학상’을 제정하는 것이다.

    “고성에서 고성이 낳은 위대한 두 문학인을 제대로 알아주고 대접하는 이들이 없어서 어떤 때는 안타깝고 서글퍼집니다. 우리나라에 인문학상과 번역문학상은 거의 없어요. 여타 지자체에서 자신의 고장이 배출한 문학인을 기리는 문학상을 제정하여 많은 예산을 쏟고 있으며 박경리와 아무런 연고가 없는 하동에는 거액의 예산을 들여 소설 속의 무대를 재현해 놓았습니다. 고성이 낳은 두 명의 걸출한 문학인을 기리는 사업은 시급하면서도 절실합니다.”

    정해룡 작가는 향후 6·25 전후 우리나라의 첨예한 좌우대립으로 희생된 보도연맹에 관한 소설을 쓰고 싶다고 한다. 몇 년간 고통의 시간이 되겠지만 아버지에 대한 사부곡을 담고, 다시는 이런 불행한 일이 되풀이 되어서는 안 된다는 준엄한 역사적인 소명을 담아 글을 써보겠다고 한다.

    또 이것은 지극히 개인적인 일이지만 읽으려고 사다 놓은 동서양 고전을 비롯한 문학서적들이 서가에 수북하다며 밤마다 책들이 자신을 보지 않는다고 원성을 해 귀가 간지럽다며 올해는 무슨 일이 있더라도 완독할 것이라고 말한다.

    “향토라는 말에 거부감이 있지만 저는 촌작가이고 고성의 작가입니다. 그리고 저는 군민들이 우리 지역 향토문화에 더욱더 관심을 가질 수 있도록 노력해야 하는 숙명을 가지고 살아가고 있습니다. 지면을 빌려 군민들에 간곡히 부탁드리고 싶은 게 있습니다. 지역문화의 발전은 지역작가를 대우해 주는 데서부터 시작됩니다. 중앙작가의 책은 구입하고 지역작가의 책은 그냥 한 권 달라고 해서는 안 됩니다. 지역작가를 푸대접하는 것은 지역문화를 스스로 폄하하는 것과 같습니다.”

    오늘도 고성의 이야깃거리, 고성의 역사를 찾아 발품을 팔고 있는 정해룡 작가. 향토문화가 대접받는 그런 날이 올 것을 희망하며 향토문화 연구에 여생을 바치겠다는 각오를 다진다. 글·사진= 김진현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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