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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살롱] 일상탐독2 (1) 이병률/나는 나만을 생각하고

  • 기사입력 : 2017-06-22 14:55:3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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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지난 2월, 40편으로 마무리 지었던 <일상탐독>을 재개합니다.
     시즌2에서는 더 진솔한 이야기들을 더 다양한 문학작품들과 함께 실어보려 합니다.
     가슴을 울리는 문학작품이 있다면 추천해주시고, 글에 대한 따끔한 지적도 서슴지 마십시오.
     다시금 많은 성원과 따뜻한 격려 부탁드립니다.
     
     
     [살롱] 일상탐독2 (1)이병률/나는 나만을 생각하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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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그녀가 그를 찾아간 건 어느 비 내리는 가을밤이었다.
     
     그를 잡아야겠다.
     그를 완벽하게 곁에 두어야겠다.
     오직 그 생각만이 그녀를 온전히 지배했다.
     그녀는 있는 힘껏 우산을 쥐고 빠르게 걸었다.
     
     그녀는 직관적으로 알았다.
     다시는 그와 같은 남자를 만나지 못하리란 걸.
     그가 지닌 사랑은 격정적이지도 저조하지도 않은 채 묵묵히 일관됐고
     세심한 배려를 동반했으며 이 시대에 보기드문 책임감을 배후에 두고 있었다.
     
     그녀가 홀로 앉아 문득 그를 떠올리면,
     햇살에 달구어져 따뜻한 반석이 아래에 드리워진 아름드리 나무가 떠오르곤 했다.
     그녀는 거기에 모든 짐을 내려놓고 스르르 잠들면 되는 거였다.
     
     그는 그런 사람이고 그가 주는 사랑이란 그런 것이다.
     그리고 그것은 한번 사는 인생에 두번 만나기 어려운 가치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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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
     그 사실을 알고도 그를 떠나 보냈다.
     그녀를 사랑하는 많은 사람들이 그녀를 현혹했다.
     
     그와 살면 불행해질 거라고, 추측과 현실이 만드는 낙차와 그 낙차를 이기지 못하고 범람하는 불행들을 강조했다.
     그녀는 아직 어렸고 일견 그 고견들은 옳게 들렸다.
     그들은 그녀가 아직 포장도 채 뜯지 않은 미완의 세월을 본격적으로, 아주 뼈저리게 맛본 사람들이었으니까.
     
     그와 함께있다 돌아온 날 밤이면
     그녀는 사랑에 눈이 먼 자신을 물끄러미 바라보는 또다른 자신을 발견하곤 했다.
     쌍생아처럼 그녀를 꼭 빼닮은 '또다른 그녀'는 무연한 얼굴로 짝다리를 짚은 채 그녀의 안과 바깥에 두루 존재했다.
     그녀는 이미 모든 것을 알고 있으리라.
     다가올 것들, 그 중에 피해야 할 것들, 그러나 끝내는 피하지 못할 것들에 대해.
     
     그녀는 그녀를 향해 끊임없이 자문했다.
     하지만 '또 다른 그녀'는 그녀에게 용기를 내보라고도 하지 않았고 무모하게 굴지 말라고도 하지 않았다.
     그것은 침묵의 수호자, 야속한 관찰자, 아무리 기도해도 응답하지 않는 신(神)에 가까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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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3.
     그렇게 시간이 지났다.
     아픈 이별을 고하고 모질게 서로를 외면한 채 두 달 남짓이 흘렀다.
     
     하지만 그것은 잘못된 판단이었다.
     아름드리 나무는 더 싱싱하게 하늘 위로 가지를 뻗어야 했다.
     행복은 그 속에서 안개처럼 뭉게뭉게 피어올라야 했다.
     그러니 이제 다시 그를 그녀의 삶으로 데려와야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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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4.
     돌아와.
     그녀가 말했다.
     인생의 그 어느 때보다 간절한 청원이었다.
     긴 침묵이 흐르는 사이 후드득, 빗방울이 우산을 세게 쳤다.
     
     …늦었다.
     돌아갈 수 없다.
     
     왜 돌아올 수 없느냐?
     
     다른 사람이 생겼다.
     그가 발끝을 노려보며 말했다.
     
     …잤느냐?
     
     그가 아주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어떻게 그럴 수 있느냐.
     고작 두달이었는데.
     우리가 만난 세월은 무엇이냐.
     그녀가 마침내 우산을 내동댕이쳤다.
     
     비는 그쳤으나, 밤은 헤어나올 수 없을 정도로 깊어져 있었다.
     
     울고 있는 그녀를 향해
     외로웠다, 라고 그가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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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5.
     다 무너져내린 곳에서 그녀는 조금씩 살았다.
     최대한 몸을 낮춰 소소하게 살았다.
     
     반석은 깨어졌고 아름드리 나무는 뿌리까지 시들었다.
     어깨에 짐을 진 채 기나긴 불면의 밤을 견뎠다.
     배신감과 모욕감과 고독감과 그리움이 차례차례 그녀를 밟고 지나갔다.
     그리고 이제 비로소 그녀는 종지부를 찍을 시점이 다가왔다는 사실을 알았다.
     
     그녀는 어느날 '또 다른 그녀'를 데리고 와 의자에 앉혔다.
     그녀도 옆으로 가 앉았다.
     
     아무리 기도해도 응답하지 않던 신(神), 용기도 주지 않지만 만류도 하지 않던 전지전능.
     그가 떠나도 그것은 고집스레 그녀 곁에 남았다.
     
     그녀가 물었다.
     아무것도 정해진 것은 없는 거냐고,
     어디에도 안전한 곳은 없는 거냐고,
     누구도 영원히 머물지는 않는 거냐고,
     그 말 하고 싶었던 거냐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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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6.
     해가 지도록 기다렸으나
     역시나 돌아오는 답은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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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나는 나만을 생각하고
     해가 진다

     나는 나만을 생각하느라
     다리를 건너다
     다리에서 한없이 쉰다
     
     우리가 우리만을 생각하는 것도 모자라
     나는 나만을 생각하고
     그 이유에 관여하는 것들이 우주의 속살로 썩는다
     
     생각을 앉히고
     생각 옆으로 가 앉지만
     나는 지렁이
     
     나는 나만을 생각하여서
     나에게 던진 질문 따위로 흘러내리고
     그러고도 지구를 지구의 손금대로 살게 할 수 없음을 방관하면서
     
     해가 진다
     고개를 들 수 없는 땅을
     끊어지지 않는 몸으로 기어야 해서
     나는 나만을 생각하느라
     참으로 그래서
     해가 지는 것이다
     
     그리하여 별이 멀어지면 멀어질수록
     나는 한사코 나만을 생각하는 것이고
     아무것도 정하지 않은 채
     나에게로만 가까워지려는 것이다'
     
     '나는 나만을 생각하고' - 이병률/문학과지성사/눈사람 여관(2013)/108페이지
     
      김유경 기자 bora@knnews.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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