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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춘추칼럼] 보수냐 민주냐- 신형철(문학평론가)

  • 기사입력 : 2017-06-30 07: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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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황석영이 광주전남지역 문화운동에 쓸 돈을 마련하기 위해 잠시 서울에 들른 것은 1980년 5월 16일 금요일이었다. 받을 돈을 받기 위해 어쩔 수 없이 주말을 서울에서 지내던 중 그는 광주로부터 올라온 비보를 듣는다. 문동환 목사의 교회 겸 공동체였던 ‘새벽의 집’에 도착해 있는, 광주 상황을 알리는 자료들은 ‘마치 조난자가 절해고도에서 구해달라고 아득하게 먼 곳에서 파도 속에 띄워보낸 병 속의 편지’ 같았고, 그는 서울의 몇몇 동지들과 함께 그 ‘병 속의 편지’에 담긴 진실을 알리기 위해 소위 UP(underground paper)조를 만들어 거리로 나서야만 했다.

    최근 출간된 황석영의 자전 ‘수인’(문학동네)에는 아득해지는 대목들이 많다. 무엇보다 안타까운 것은 진실의 자유로운 유통이 봉쇄됐던 시절의 저 숱한 희생들이었다. 유신정권 이래의 광기어린 언론 통제 속에서 운동가 혹은 활동가들의 투쟁이란 결국 진실로부터 격리돼 있는 이들에게 그것을 알리기 위해 목숨을 걸거나 혹은 바치는 일이었다는 사실을 이 책을 읽으며 실감했다. 그분들의 입장에서 촛불혁명을, 이를테면 태블릿 PC의 진실을 보도한 언론과 그 진실을 신속히 공유하며 자발적으로 거리로 나온 시민들을 생각해 보면, 나조차도 벅찬 격세지감을 느끼게 된다.

    지난 시대 진실의 운명을 생각할 때 또 한 번 착잡한 것은 당시 그토록 위태로운 진실의 생명을 짓이긴 이들 중에 문인들도 있다는 사실이다. 다시 ‘수인’의 한 대목을 펼친다. 1988년 서울 올림픽을 앞두고 국제펜클럽은 뜻한 바 있어 펜클럽 세계대회를 서울에서 개최하기로 결정한다. 그러나 ‘당시 한국펜클럽은 문인협회나 예총 등과 마찬가지로 관변단체에 불과’했으므로, 미국펜클럽 회장이었던 수전 손택은 황석영 등을 위시한 민주 진영 문인들과 접촉해, 김남주 시인 등 구속 문인들의 석방을 촉구하는 결의문을 통과시키고 한국의 진실을 세계에 알리겠다는 뜻을 전한다.

    그러나 뜻밖에도 결의문 채택은 부결됐는데 그때 분해서 눈물을 삼키던 수전 손택에게 더욱 충격적인 것은 한국펜클럽 측의 환호였다. 당시 기사에 ‘동료 문인을 석방하자는 해외 문인들의 결의안을 부결시키고 오히려 기뻐하는 한국 문인들의 정체성에 국제펜클럽 회원들은 혼란을 느꼈다’라는 내용이 실릴 정도였으니 말이다. 훗날 밝혀진 저 부결과 환호의 내막은 이렇다. 한국펜클럽 회장과 관련자들이 대회 전날 해외 문인들의 호텔방을 방문해 거액이 담긴 봉투를 돌리며 반대와 기권을 유도했다는 것. 자, 이것이 군부독재 시절 자칭 ‘보수’ 문인들의 활동이다.

    대한민국에서 ‘보수’란 무엇이었던가. 최근 출간된 사회학자 김종엽의 저서 ‘분단체제와 87년체제’(창비)의 한 대목(2장, 각주 20)에서 저자는 ‘보수와 진보’ 대신에 ‘보수와 민주’라는 명명법을 택하고 그 이유를 밝힌다. “구별의 두 항은 각각 상대가 아닌 것을 통해 의미를 획득한다.” 즉, ‘보수와 진보’라는 구별에서 보수는 ‘진보가 아닌’ 것이 되지만, ‘보수와 민주’라는 구도에서 보수는 ‘민주가 아닌’ 것으로 제 자리를 부여받는다는 것. “이렇게 구별하면 분단체제 아래서 보수가 민주적 법치를 온전하게 수용하지 않는 집단임을 보여줄 수 있다.”

    ‘수구’라 불리는 ‘냉전형 보수’와는 구별되는 소위 ‘합리적 보수’도 있지 않느냐는 반론이 제기될 법하다. 그러나 “수구세력이 이른바 합리적 보수에 대해 헤게모니를 장악하고 있는 것이 우리 사회 보수파의 특징”이라는 것이 저자의 답변이다. 과연 그렇다. 자신들도 안 믿는 안보 선동으로 생존을 도모해온 ‘냉전형 보수’ 정당의 최근 지지율이 15%인데, ‘합리적 보수’를 선언한 정당의 지지율은 여전히 5%니 말이다. 이것이 한국적 보수의 참담한 실상이다. 보수의 위기? 아니, 진실을 감옥에 가두고 돈 봉투로 틀어막아온 ‘반민주’ 세력의 위기일 뿐이다. 한국의 보수는 시작된 적도 없다.

    신형철 (문학평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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